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발에 밟힌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진리의 빛이 없으면 세상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따라서 거룩한 행실로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마 5:13-20)
•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신자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되라 하지 아니하고 신자는 이미 세상에 대해서 소금이 되어 있다고 했다. “소금”은,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 불가결한 물질이다. 그처럼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다. 소금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 신자가 없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다. 소금이 아주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사람들이 소금 가마니의 대접은 잘해 주지 않는다. 성도가 소금 가마니처럼 대접은 잘 받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소금의 생명은 짠 데 있다. 그러므로 맛 잃은 소금은 소금이 아니요 아무 소용이 없다.
“짠 소금”은 믿음을 지키는 성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자기 인격을 만들어야 한다. 말씀을 지키는 성도는 짠 소금이 된 것이다. 소금은 어디서나 짠맛을 낸다. 성도는 항상 변함이 없고 진실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항상 진실하게 된다. 이 세상은 거짓과 외식이 가득하고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이 요구되고 있다. 사회 어느 곳에서나 진실한 사람을 찾아 귀한 일을 맡기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는 성도는 언제나 양심을 쓰고 진실하여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윤리도 있고, 사람에게 대한 윤리도 있다.
십계명 중 1~4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며 5~10 계명은 사람에 대한 계명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바로 하고, 사람 앞에서도 바로 하게 된다. 신자가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면 하나님께 바로 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바로 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필요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사람에 대하여도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참 성도이다. 성도는 왕, 관리, 부모, 자녀, 윗사람, 형제, 동료, 아랫사람에 대하여 자기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 또 직무에 대하여도 책임을 바로 해야 된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가 있다가 총리가 되었으나 항상 하나님 앞에 바로 하였고, 바벨론의 왕에게도 충성되어 아무 흠을 찾을 수 없었다. 요셉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나중에는 총리가 되었는데 종으로 있을 때나 총리로 있을 때나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로 하고, 사람 앞에서도 바로 하였다. 요셉이 왕에게 바로 하고, 부모 형제에게도 바로 하고, 백성에게도 바로 하였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을 살리고 자기 부모 형제를 살려내었다. 요셉은 애굽에 있어서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나 항상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었다. 이것이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다.
소금의 특징은 ① 맛을 내고, ② 부패를 방지하고, ③ 변하지 않게 하며, ④ 생명을 보존하고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 소금은 형체가 녹아져서 보이지 않아야 짠맛을 낸다. 성도가 이 소금의 특징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만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① 자신에게는 맛이 없어지고(신앙의 맛이 없어짐), ② 하나님은 내어버리고, ③ 세상 사람은 발로 밟게 된다.
맛이 없어졌다는 것은 신앙의 생명력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을 보아도 맛이 없고 기도를 해도 맛이 없고 다만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쯤 되면 멀지 알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이 발로 밟게 될 것이다.
성도가 맛을 잃게 되는 것은 믿음을 지키지 않는 까닭이다. 여덟 가지 복된 성품을 잃어버리고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맛 잃은 소금이요 하나님께서 버리시게 된다. 세상 사람들도 “저 따위가 다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여 조롱하고 발로 밟게 된다. 성도가 소금의 본분을 다하려면 자신이 희생되어야 한다. 소금이 녹아져서 자신의 형태가 없어져야 맛을 내고 소금이 녹지 않으면 짠맛을 내지 못한다.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회생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사명과 사람에 대한 자기의 도리를 충성되이 해나가야 한다. 소금 노릇을 제대로 하는 성도는 하나님에게도 유익한 사람이고 사람에게도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된다. 성도는 이미 소금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본분(맛)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성도가 말씀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가는 곳마다 맛을 내고 무슨 일에나 희생하고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장을 돌리게 된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소금 노릇을 잘하였고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
•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벌써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성도는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였으며, 영혼이 중생하여 빛 되신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 있는데 그 빛을 숨기지 못한다. 그 빛은 끊임없이 세상을 비추어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비추어 나가면 하나님이 증거 되고 진리가 전파되며 죄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흑암에 거하는 사람들은 빛을 부끄러워하고 거절하며 어두운 곳에 머물기를 좋아한다(요 3:19-20 참조).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곳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 나갔다. 또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으나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빛이 비치어 나가므로 어두운 곳이 환하게 밝아졌다. 성도에게서 비치어 나가는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믿는 사람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아서 그 빛을 세상에 비추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성도는 진리의 역사와 영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로 빛을 비추어 나가게 되어 있다(빌 2:15-16 참조). 이것을 마치 등불을 등경 위에 놓고 집안 사람에게 비치게 하는 것같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되어 있다. 마태복음 10:26에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성도에게서 나가는 빛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그 분위기와 환경을 통하여 비칠 수 있는 범위까지 비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도가 그 빛을 말 아래 두면 비취어 나가지 못한다.
말 아래 두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성도가 육신의 욕심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육신의 욕심대로 살면 빛을 비추어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모든 정욕, 당파, 탐욕, 이기주의, 쟁투, 시기, 분쟁, 우상숭배, 술수, 인본주의는 모두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빛이 가리워져서 비취지 못하고 있다. 성도가 말씀의 인도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중생한 영혼인 새 사람으로 살면 반드시 빛이 비취어 나가게 된다. 이 빛은 아무도 막을 자가 없고 점점 널리 비취어 나갈 것이다.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엡 5:9 참조). 빛을 비추어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성도는 착한 열매를 많이 맺혀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의의 열매를 많이 맺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리는 자는 천국에서 상급이 클 것이다.
•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며 율법을 완성시키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율법서에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려서 속죄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피 흘려 대속하여 주실 것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히 10:1, 골 2:16-17 참조). 구약에 있어서는 그림자로만 나타났으나 신약에는 그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와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림자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이 실체가 되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전해졌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다. 신구약 성경을 다 지키시고 모든 계명을 다 지킨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다. 완전한 의를 이루어서 성도에게 주시려고 친히 다 지키셨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켰다 함은 ① 예수님의 그림자인 구약의 제도, 의식, 의문에 대한 실체로 오신 일 ② 예수님이 피 흘려서 완전한 속죄제를 드려 주신 일 ③ 하나님의 모든 말씀(신구약 성경)을 온전히 순종하여 완전한 의를 이루신 일을 말한다.
• 5: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신약시대에는 구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신약시대에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으나 그것은 구약의 의식(儀式)과 의문(儀文)에 속한 제도들이다. 그것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도말하셨다.
골로새서 2:14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의문과 제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리는 신약시대에도 버려서는 안 되고 지켜야 한다. 구약의 의문과 의식은 도말했으나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리는 영원불변의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므로 오늘날도 지켜야 한다.
예를 들면 소나 양으로 제사하는 그 의식은 도말했으나 그 의식이 내포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레위기 11장에 성도는 쪽발 갈라진 짐승만 먹고 비늘 있는 고기만 먹으라고 했는데 그 의식은 도말했으나 거기에 내포한 진리는 남아있으니 곧 성도는 구별된 생활을(쪽발 갈라진 것) 할 것과 전신갑주(비늘 있는 것)를 입으라는 뜻이다(엡 6:11-13 참조).
의식이 내포한 진리는 영원히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바로 깨달아 바로 믿겠다는 사람을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주의이다. 예를 들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벌써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고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징계하신다. 성도가 성경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받게 된다(신 28:1-68 참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버리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입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라고 하셨다(마 7:24-26 참조).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으니(약 2:26 참조), 성경대로 바르게 살려는 사람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천지가 없어진다고 하여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라고 다 이루어질 것이니 그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믿고 바로 순종해 나가는 성도는 그 말씀에 허락한 복은 다 받을 것이요 그 말씀을 버리는 자는 그 말씀에 기록된 저주를 받을 것이다.
•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와 같이 가르치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된다. 그러나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 구원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얻게 된다. 성도의 행위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데에만 관계가 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에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면 누구나 다 같다고 하는 것은 이 말씀에 위배된다. 성경 말씀을 많이 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서 큰 자가 되고 예수를 믿어도 성경 말씀을 순종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천국에는 갈지라도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천국에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천국에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어야 공평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일생동안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많은 고난과 환란을 받으면서 믿음을 지켰는데 이러한 사도바울과 일생동안 죄만 짓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회개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에서 똑같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평치 못하다. 벌콥 씨는 지옥에도 차등이 있다고 하였다. 죄악에 따라서 좀 더 고통이 심한 사람이 있고 고통이 조금 덜한 사람이 있다(마 11:21-24 참조).
천국에서 순교자의 반열은 아주 영광스러운 반열이다. 그다음에 주를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많이 하여 자기를 많이 만든 사람은 그만큼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는다. 예수를 믿었으나 성경 말씀대로 많이 행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었으므로 천국에는 가지만 말씀을 행한 것이 별로 없고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없으므로 그만큼 영광을 다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많이 행하고 주를 위해 고난을 맏이 받은 사람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다. 면류관에도 종류가 많다.
① 영광의 면류관 (벧전 5:4).
② 자랑의 면류관 (살전 2:19).
③ 의의 면류관 (딤후 4:8).
④ 금 면류관 (계 14:14).
⑤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⑥ 즐거운 면류관 (빌 4:1).
⑦ 썩지 않을 면류관 (고전 9:25)이 있다고 하였다. 말씀을 지키어 영이 자라난 사람(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사람)은 자라난 그대로 천국에 가고 영이 자라나지 못한 사람도 그대로 천국에 갔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이 자라나야 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너희가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하였다(고전 9:1 참조).
어린아이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한다. 자라난 사람은 장성한 자의 불량에 이르러 단단한 식물을 먹고 의의 말씀을 분별하는 자이다(히 5:13-14 참조).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자라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또 그리로 가르치는 사람은 그 영이 점점 자라난다. 에베소서 4:15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였다. 성도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말씀대로 힘써 행하여 자라나야 된다.
•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 또 토색 하지 아니하고, 음란하지 아니하여 외부적 행위 면으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의는 자기가 참된 믿음이 없이 행한 의이고 신자의 의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의이니 곧 예수님이 행하신 의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의, 즉 하나님의 의를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자기가 행한 의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롬 9:30-33, 10:3 참조).
예수님이 행한 의를 받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신구약 성경을 다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여 완전한 의를 이루어 놓으셨는데 우리 성도는 믿음으로 그 의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히브리어 성경 전도서 3장 강해] 인생만사 모두가 하나님의 때가 있다(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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