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신약에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진노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받을 진노가 예수님께로 전가되었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 임마누엘(마 1:22-25)
22절 투토 데 홀론 게고넨 히나 플레로데 토 레덴 휘포 퀴리우 디아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성 경: [마1:2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써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성 경: [마1:22-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 13:35;21:4; 26:56;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23절 이두 헤 파르데노스 엔 가스트리 헥세이 카이 텍세타이 휘온 카이 칼레수신 토 오노마 아우투 엠마누엘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메드 헤몬 호 데오스
성 경: [마1: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 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 있게 생각되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 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 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 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 전의 풋내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 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 뜻의 '알람'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 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24절 디에게르데이스 데 호 이오세프 아포 투 휘프누 에포이에센 호스 프로세탁센 아우토 호 앙겔로스 퀴리우 카이 파렐라벤 텐 귀나이카 아우투
성 경: [마1:2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 동침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25절 카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헤오스 후 에테켄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카이 에칼레센 토 오노마 아우투 이에순
성 경: [마1:2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가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 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마태복음 족보 주석 강해설교]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마 1:18-21)
'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서 5장 성경말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눈물(히 5:7) (0) | 2022.06.18 |
---|---|
[히브리서 4장 설교말씀] 복음이 주는 안식(히 4:1-11) (0) | 2022.06.18 |
[마태복음 히브리어 예수님 말씀] 사탄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마 4:1-11) (0) | 2022.06.06 |
[마태복음 원어성경 강해말씀]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시냐(마 2:1-4) (0) | 2022.06.02 |
[마태복음 족보 주석 강해설교]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마 1:18-21) (0) | 2022.06.02 |
[마태복음 13장 예수님 말씀] 값진 진주 예수(마 13:45-46) (0) | 2022.05.31 |
[마태복음 비유 예수님 말씀]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마 13:44-46) (0) | 2022.05.31 |
[성경 읽기 성경공부] 신구약 성경의 가난에 관련된 성경 구절 (0) | 202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