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주기도문 강해] 기도 대상/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b)

베들레헴 2022. 3. 9. 11:40
반응형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향하여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의 대상/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 b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에는 첫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제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의 토대인 이 첫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기도의 토대와 대상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우리 아버지 여"라고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이 호칭은 어떤 편지의 서두에 쓰는 수취인 이름과 같은 단순한 호칭적 문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실상을 계시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그 하나님을 합당하게 인식하는 것, 우리의 영흔을 그 높이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기도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비록 지극히 진실하다 하더라도 이점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심각하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바람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 이 확고부동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마음을 채우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단순한 이름 앞에 우리의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발아래 들어찬 빽빽한 구름 사이를 뚫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우리의 주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온갖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눈으로 베일을 꿰뚫고 거룩한 하나님을 주시하는 것은 모든 실질적 기도에 반드시 필요한 예비적 단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분명하고 확고한 주시는 모든 참된 기도의 기초와 시작입니다. 이러한 주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 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분으로 우리와 친족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인류 또는 만물의 아버지라는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주와 인류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 곧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 바울은 에베소서 3:14 이하에서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 주되신 능력의 하나님이 시라는 의미로,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12:9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영의 창조주 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 "영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 바울은 아덴에서"우리가 다 신의 소생"이라고 희랍의 두 시인 아라투스와 클린 데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일차적으로 생명의 원천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으며, 부차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과 이방인들 조차도'신(神)에 대해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문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은 원초적 행위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육체적 자손이라는 신화적 사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보다 깊은 의미로"아버지"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 모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했습니다 (신 14:10 이하 32:6).

-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 굽에서 불러내었으며,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팔에 안고 걸음을 가르치고. 사랑의 줄로 이끌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호 11:1 이하).

- 말라기는"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 니냐"(말 2:10)라고 말했습니다.

- 이사야는"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시라"(사 63:16; 참조, 시 89:6)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우주 및 인간의 창조주라는 근거에서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 조차도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어(사 63:16; 64:8)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신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관한 진정한 기독교적 개념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부자관계와 육적 이스라엘의 선택적 부자관계 외에 새로운 출생이 있어야만 형성될 수 있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아버지 되심과 아들 되심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계 성립의 조건을 복음서 기자가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는"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된 자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우리 아바"라 부를 수 있고 이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아람어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압바(abb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는 세 곳에만 나타납니다.

-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 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말한 두 구절에 나타납니다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 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아람어 원문에는'압바'로 나타납니다(눅 1:2).

 

아람에서 압바(abba)는 원래 그에 동등한 여성 명사 임마(imma)처럼 유아 언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어린애가 젖을 떼게 되면 그 아이는 압바(아빠)와 임마(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러한 의미가 확장하여 아버지의 호칭형인 압바란 단어가 더 이상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 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단어의 유아적 성격(아빠)은 사라지고, 압바는'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름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압바라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를 기도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주의가 낳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헌 중 어디서도 압바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베미아스(J.Jeremias)는'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호칭형으로 압바를 사용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모든 유대 문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서 압바를 사용한 예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일상 가정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전 5:1).

하나님은 무한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지만"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열국을 다스리시며, 파도를 명령하시며, 창조와 재 창조를 하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심판과 자비를 내리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려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압바로 부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 압바를 기도에서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의 태도뿐 아니라(막 14:36) 비할 데 없는 권위를 표현합니다(마 11:25).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는 권세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아들인 자기의 지위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에서 압바를 사용하는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있었던 두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롬 8:14,15; 갈 4:6). 바울은 사랑하는 아버지 압바를 부르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는 증거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찾아보고 있습니다(롬 8:14 이하 갈 4:4-7).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압바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l8; 삼하 7:14의 자유로운 인용). 0. Hofius.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으시고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작정하신 뜻과 그 성취에 대해 사도 바울은"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 5, 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먼저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 찢으시고 피 쏟아주신 우리 주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이 우리의 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생의 관계를 바로 잡아줍니다.

 

(1)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 줍니다.

인간은 아무도 감히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이런 친숙한 말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칭호의 사용을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소망과 친밀한 신뢰감을 가지고 그 앞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서워하는 종들처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에게 나아가듯, 그의 사랑 가운데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개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로마의 한 황제가 싸움에 이기고 군대의 선두에 서서 개선의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군중이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키 큰 병사들은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연도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황제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자 군중을 헤치고 연도에 늘어선 병사들의 다리 사이로 피하여

달려가 황제가 탄 호화로운 전차 위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병사 몇 명이 이 아이를 가로막고 말리며'전차에 타고 계신 분은 황제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당신에게는 황제이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야'라고 말했습니다. 개선한 황제의 전차 위에 함께 올라 탈 수 있는 것은 아들인 아이의 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2)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바로 잡아 줍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자신을 경멸하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심한 연약과 철저한 굴욕 가운데 처하여 외롭고 무력함을 느끼고 생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임을 강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업에 실패로 비참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낸 시련에서 욥과 같은 고난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흑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우리는 늘 마음속에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아도 사랑과 전능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분은 나를 참으로 붙들어주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 다.

이 믿음은 어떠한 절망과 무력감에서도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3) 셋째로, 이러한 관념은 우리가 자칫 잘못 품기 쉬운 하나님에 대한 제반 개념을 바로 잡아줍니다.

이방인들은 신(神)을 잔인한 복수자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질투의 신(神)과 포악한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양심과 두려움이 잘못 형성하기 쉬운 신(神)에 관한 무서운 이미지를 품고 있지나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커다란 간격을 두는 주종(主從)의 관계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이 강력한 한 마디 말씀은 온갖 공포와 좌절과 그릇된 사상을 산산이 흩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 되심과 같이 우리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듯이, 사랑하는 아들이 자애로운 아버지 앞에 나아가듯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책망하시고 매로 치시기도 하지만, 무서운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시고 용서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대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용서 하시고 자애로우신 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자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도 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의 부름과 호소일 뿐만 아니라 서원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대한 최고 사랑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순응에 묶는 끈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상한 기도는 "아바 아버지"라는 부르짖음입니다.

 

2.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초월성, 고귀성, 완전성을 인식시켜 주는 표현입니다.

 

"하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라노스(헬 3772)는 복수 명사로 문자적으로'하늘들'입니다. 이 하늘은 천문학적,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라 상징적, 영적 의미의 하늘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신적 공간들,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 특별히 그가 계시는 천국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하늘에 계신"이란 표현은 어떤 사실보다도 하나님이 지상을 초월하여 계심을 표현하는 상징적 문구로서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지상의 한계와 제반 조건으로부터, 온갖 가변성과 불완전성으로부터 초월하여 있다는 관념을 암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인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려 줍니다.

이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깊게 하여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며, 우리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하여 공포를 쫓아내어 줍니다.

그 리하여 친밀감을 가지면서도 경외감으로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M. 막달겐은'친밀감이 존경과 균형을 이루고, 친숙한 부름이 경외감과 균형을 이루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이 그의 초월성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연약성과 가변성이 전혀 없는 고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지상적 아버지의 모습, 즉 시야가 좁고 목적이 확고하지 못하고 자애로움이 부족하고 힘이 유한한 존재를 뛰어넘은 전지,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를 계시해 줍니다.

 

(3)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사상은 모든 장소나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이러한 영적 존재라는 사상은 우리를 가지적 존재에 대한 예배와 가시적 존재를 수단으로 한 예배에서 구해줍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예배의 외적인 것들과 부차적 형식, 시간, 장소 등에 대해 중점을 두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하여 줍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어떤 장소를 구분하고 시간을 정하고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 만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집회는 이와 다른 규 정이 있습니다.

 

(4)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우리 아버지의 본향으로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저 위로 끌려 을라가며, 세상과 상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여 저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만한 태도나 주제넘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공적 예배에서 우리가 불시에 기도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느끼고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생각이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안이한 위안이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분은 좋은 아버지시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와 결점과 잘못에 대하여 그 정당한 진노와 심판을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사랑과 거룩이 조화되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의 크신 사랑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상에서 우리 위해 살 찢으시고 피 솟아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의 전지, 전능하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 인간의 능력은 유한합니다.

- 사람은 사랑과 열의가 있어도 때때로 무력감에서 좌절합니다. 얼마나 많은 자애로운 부모들이 병든 자식의 침상 곁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게 한다든지 또는 하지 못하게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버릇이 나쁜 자녀를 가진 부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큰 비존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으나 중도 패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시 115:2).

 

여러분 우리는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십니다.

- 하나님은 부드러운 긍휼로 우리를 굽어 살피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기쁨과 번영을 가장 원하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가 복주시기를 원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우리를 복주시려 열심이십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 하나님은 하늘의 모든 복으로 우리를 복주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을 하늘의 본향으로 모아들여 자기 곁에서 세세 무궁토록 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접근하면서 그의 거룩하심과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과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해내시는 그의 능력 배후에 역사하시는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러면 소망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간구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분이 일용할 양식마저 구하기 전에, 그 무엇을 구하기에 앞서 여러분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존전에 있음을 반드시 인식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합니다.

 

3. "우리 아버지"라는 이름은 신자들의 형제애와 공동체성, 곧 천국 자녀들은 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표현입니다.

 

"우리 아버지여"라는 이름에"하늘에 계신"을 부가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를 전통적인 가족 개념인 혈육관계가 아닌 새로운 가족 관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섬깁니다. 누구든지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을"우리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진 한 형제입니다.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는 각기 그 신학적인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한 아버지를 가진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자들은 서로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유명한 설교가 훳필드와 웨슬레의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에 관하여 잘 설명해주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웨슬레와 훳필드는 같이 영국에서 경건 운동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앙의 동지로서 복음사역을 같이하다가 영국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 문제로 부딪혔습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자, 곧 장로교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절대 멸망받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라고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마차 원수처럼 논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훳필드를 열렬히 추종하는 한 여신도가 훳필드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웨슬레 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면 보이지 않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웨슬레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훳필드 목사가 하는 말이 '그래요, 천국 가면 웨슬레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신도가 좋아하고 있는데 휫필드 목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웨슬레는 예수님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광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는 간신히 구원을 받아서 저 문가에 있기 때문에 웨슬레를 천국에서 못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형제를 존경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틀린다고 하여 한 형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리교의 하나님, 장로교의 하나님, 루터교의 하나님, 침례교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십니다.

 

(1) 축복의 진정한 향유는 우리가 이 축복을 남과 나누어 갖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홀로만 간직하고자 하면 잃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커다란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이 기도를 통하여 이 공동체의 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표현합니다.

 

(2) 이 공동체 의식이 우리 기도에 미치는 효과는 기도의 이기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곧 천국 자녀들의 기도를 자기의 기쁨과 필요만을 구하는 이기적 몰입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3) 이 공동체 사상이 우리 삶에 미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감히 자신만을 위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인 적대감정, 허영심, 이기심, 남과의 경쟁심 둥 속에서 형제애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종의 차이. 교육의 차이, 직업의 차이, 지방색 등에서 일어나는 관념의 차이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부의 수준차와 지위의 차이는 우리 서로를 소원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관념의 차이가 종종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마음 아프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우리 아버지"라 말할 때 이 모든 것들은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 기도를 드리다가 무덤 속에 들어간 여러 세대들을 생각해 보시요. 이 기도는 하늘에 관한 얼마나 놀라운 예언입니까? 하늘에서 모든 사람은 함께 모여 서로가 한 아버지'밑에 있는 형제들'임을 더욱 깊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 사이에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의견의 일치가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인간들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권의 일치는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인간들은 계산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맹은 진정한 화합을 파괴시킵니다.

공통적인 목표들은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천박하고 피상적입니다.

국가 또는 민족의 일치는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보편성, 전세계성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에 기초를 둔 형제애 외에는 진정한 형제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제"나그네와 외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과 함께 우리를 상속자로 만드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가운데, 목소리를 드높여 " 우리 아버지여"라고 외치도록 합시다. - 아멘-

[마태복음 주기도문 예수님 말씀] 주기도문의 서론(마태복음 6:9 a)

 

[마태복음 주기도문 예수님 말씀] 주기도문의 서론(마태복음 6:9 a)

마태복음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bethlehem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