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서론
마태복음 6:9 a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서론에서는 주기도의 구성과 내용, 그 사용의 주의와,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주기도의 구성과 내용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외견상으로는 어린아이와 야만인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그 이면에 갚은 의미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정신을 집중하여 살펴보면, 그리고 그 모든 의 미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푸른 창공을 바라볼 때 마치 하늘이 열리듯이, 우리가 물속의 투명한 암흑을 굽어 꿰뚫어 볼 때 마치 바다가 열리듯이, 그 말씀의 의미가 열리게 됩니다.
지극히 부족한 자들과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라도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강력한 도움에 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극히 마음이 깊은 이들이 경외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 말씀을 명상해 보면, (그리고 온갖 시대의 경험에 의하면) 그 말씀 에는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깊은 진리가 있으며 아직도 배우지 못한 많은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시고 마셔도 다함이 없는 샘물 같고,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의 떡과 같습니다. 그들이 모두 먹고 배불렀으니 남자와 아이들이라 그들이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그러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 그들은 이 간단한 주기도문을 작은 두 손을 합장하고 혀짤배기 발음으로 잘도 암송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를 우리 기 도의 견본으로 삼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충만하고 풍성한 의미가 더욱 놀랍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라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눅 11:12).
이 주기도의 내용 구성에 대해 먼저 살펴봅시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대상을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내용으로서, 그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며, 그 후반부는 인간에 관한 간구,“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셋째는 송영,“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주후 3세기의 라틴교부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격과 삶과 모든 사역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인간의 사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마귀와 대결하여 투쟁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러한 것을 위한 간구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간단한 설명을 먼저 들어봅시다. -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이 기도를 시작할 때 아버지와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새롭게 파악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이 나타나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소개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확립되기를 기도할 때, 세상적 기준을 역전시키므로 말미암아 사회를 변화시키며, 그 사회를 사랑의 법에 순응시키므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좀 더 앞당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수용하신 것처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어떻게 주실 것인지를 아시고, 그들이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아버지에게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 아버지는 몸을 위 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우리를 유지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의 한 형제자매로서 교제(交際)의 아름다운 비결을 배워 서로 친교 하며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우리의 떡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요 구하십니다(행 2:44-47, 고전 11:20, 2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서로 나눕시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몸과 마음과 영의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적이든, 영적이든 우리의 질병의 어떤 것이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발병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처럼 아무 런 대가 없이 완전히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에게 용서의 영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어떠한 생활 형편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실 수 있고, 또한 구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확언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참조: M.Magdalen의 Jesus, Man of prayer).
이 주기도문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 주는 지극히 고상한 계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와 우리 상호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진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지극히 장엄한 비전, 일상생활의 지극히 사소한 요망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등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영적, 또는 육적 행복을 위한 어떤 것도 빠져있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온갖 무가치하고 잘못된 사상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립니다.
-주기도문은 [신앙에 관한 강해]로서 그 정신을 마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고집과 죄를 버리게 합니다.
-주기도문은 [사회 윤리의 근본 초석]으로서. 참된 인간애의 유일한 토대로 군림합니다. 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인류에 대한 자비와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삶을 영위합니다.
-주기도문은 [개인 생활의 지침]으로서, 온갖 인간 욕구의 상대적 가치 및 가치 순서를. 그리고 이와 아울러 우리가 추구할 일과 삶의 목표의 순서 및 종속 관계를 권위 있게 밝혀줍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기도]로서 온갖 영역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7가지 간구 속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신적 이름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그 모든 내용을 감사의 합창으로 종결시키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예언]으로서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나라, 투쟁하고 범죄하고 근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갖 악에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는 지극히 숭고한 환상을 펼치고 있습니다.
2. 주기도문의 사용과 주의
주기도는 삶의 필수적인 영역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분별하게 보편적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기도는 처음에 특정한 집단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으며 사도들 은“그 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전통이 세워지고 박해의 위협이 더해짐에 따라 입교자의 세례(침례)를 받는 밤에 주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주기도는 이교도까지 포함하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함부로 외어대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실제로 주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어린 시절부터 주일 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은 목회 만필에서‘19세에 예수님을 믿고, 주일학교 교사, 집사, 권사, 장로로 목사가 되어 90세가 되는 오늘까지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워왔으나 금년에 와서 주기도의 깊은 뜻을 확실히 깨달았다. 철들자 망령이라더니 참으로 만각이 라고 하시면서 나의 깨달은 것을 여기에 적는다’고 하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저작집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나는 오늘까지 어린아이와 갈이 주기도에서 젖을 먹고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도에서 먹고 마시지만 아직도 더 먹고 마시려고 갈망하고 있다. 이 기도는 최고의 기도이며,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시편보다도 더 좋아한다. 이 기도는 확실히 한 참된 스승만이 만들고 가르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스승의 기도가 세상의 전 지역에서 그렇게도 무례하게, 경솔히 재갈거리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한 해 동안 주기도를 수천번이나 기도하고, 그들이 천년 동안 그렇게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할지라도 주기도의 일점일획의 진정한 맛도 맛보지 못하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모든 사람이 그 기도를 남용한다. 그 기도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위안과 복을 얻는 사람은 극히 적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보통 일어나는 의문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지만 언급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기도의 한 형식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아니면 오로지 한 실례를 들고자 하셨습니까? 어떤 교회(영국 국교회)는 한 형식이라고 말하고 어떤 교회(비국교도들)는 한 실례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문이 한 형식이든 아니든, 주님의 주요 목적이 단어들을 규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반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하나의 형식으로 주셨다기보다는 한 실례 또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 가지는 그 중요한 의미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구두로 짜 맞추어야 할 형식(틀)을 주셨는지, 혹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에 준해 간구를 올려야 할 어떤 개요를 주셨는지 하는 문제보다 깊은 것입니다.
또 단어 하나하나 자체를 기도 시에 사용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각자와 각 교회가 알아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것은 일정한 기도의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참된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좌우될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 한 형식을 사용한다 하여 그것이 최고도의 영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의 틀을 사용하는 것, 특히 오로지 그 형식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틀 속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는 이교도적 기도 형식의 교정 책으로 주어진 이 주기도문 자체가,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바로 이러한 이교도적 과오의 가장 서글픈 한 실례가 되고 말았다는 점은 심각하고도 아이러니칼 한 문제입니다. 손가락으로 염주알을 굴리며,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그러한 잘못입니다.
주기도문과 아베마리아를 외우는 횟수가 공로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가련한 천주교인들과 주기도문을 수백, 수천번 암송하는 기도를 하면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듣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유사한 미신 적 습관이 없습니까? 이런 어리석고 위험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3. "이렇게 기도하라”의 진정한 의미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접속사 운(헬 3767)은‘그러므로, 그러면, 따라서’를 뜻하며, 여기서 어느 의미로도 가능하지만 ‘그러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과 이 주기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에 해당하는 부사 후토스(헬 3779)는‘이렇게, 이러한 방식으로’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는 구문에서 앞에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뒤따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앞에 말씀하신 것과 동시에 그가 지금 가르치고자 하는 주기도에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는 말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사상은 기도에서의 삶의 정신과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신자의 삶과 그 정신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기도에서 보여준 삶의 정신으로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세속심에서 자기의 욕망과 세속적 소원을 토로하는 것은 우상 앞에서 할 일입니다. 자기의 욕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만족을, 고상한 삶보다는 저급한 삶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일이야 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기도의 자세. 순서, 방법, 언어 등을 배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라”에 해당하는 동사 프로스케스데(헬 4336)는‘기도하다, 간청하다’를 뜻하는 프로스코마이의 명령 중간태 수동태 디포넌트 동사이며, 자신이나 타자와 관련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라”명령하신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시는 것이며. 또한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전능자 우리 주님의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기도하기만 하면 확실히 기도는 응답되고 은혜와 복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정신을 흡수한 자들, 자신의 만족에 앞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 하나님의 손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굶주림을 채울 양식을 위해 탄원할 줄 아는 자들은, 이러한 주기도문의 용어들을 사용하든 하지 않든 확실히 “이렇게”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문은 세상을 수위에 두고자 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을 타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도록 굽히는 데 있습니다. 분명코 자아 부정과 순종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진대, 그 점은 종교의 지성소라 할 수 있는 기도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고 일방적으로 간청하거나 명령하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첫째로 두고 나는 둘째가 되는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엄청난 요구입니다. 누가 감히 이 거룩한 말들을 자기 입술 속에 함부로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대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기도를 뒷받침하고 확증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이렇게”기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슴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투자되는 우리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가장 고상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심장 속의 피가 세상적인 것들을 향한 뜨겁고도 정열적인 욕망을 품어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영흔 속에 아무런 욕구도 불 붙이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어떤 멀리 떨어진 꿈결 속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마치 멀리 떨어진 별들은 지상에 희미한 빛 밖에 주지 못하고 조수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태양에서 빛을 빌리는, 지구에 가까운 달이 오히려 조류를 좌우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계와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을 발휘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신약 히브리어 성경 마태복음] 헤롯의 음모와 요셉의 애굽 도피(마 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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