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서는 역사가 일어났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다. 베드로는 각각 회개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준다고 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했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떡을 떼기에 힘썼다.
초대 교회의 부흥의 역사(행 2:37-47)
성 경: [행2:37] 아쿠산테스 데 카테뉘게산 테 카르디아 에이폰 테 프로스 톤 페트론 카이 투스 로이푸스 아포스톨루스 티 포이에소멘 안드레스 아델포이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려'(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움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 16:8-11)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아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자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 베자사본과 몇몇 서방 본문들에는 '다른 사도들'이란 말에서 '다른'이란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를 사도들과 특별하게 구별하기 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다른'이란 표현이 삽입되면 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생략될 경우 베드로가 사도들보다 우월한 어떤 권위를 지닌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강조하고있는 것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사도들의 주도권이지 베드로 자신의 주도권이 아니다(Richard N. Longenecker). 사실상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본서에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서 으뜸 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의 대변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 어이할꼬 -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16: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22:10).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성 경: [행2:38] 페트로스 데 에페 프로스 아우투스 메타노에사테 카이 밥티스데토 헤카스토스 휘몬 에피 토 오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카이 렙세스데 텐 도레안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 '회개하다'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죄의 고백을 뜻한다. 마음의 변화란 전인격에 대한 것으로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인격 그리고 신앙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로 나아가는 인격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본서에 여러 번 반복되었다(3:19; 5:31; 8:22; 11:18; 13:24; 17:30:19:4; 20:21; 26:20).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 이 말은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세례를 받으라'는뜻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세례는 유대교에서 시행해 왔던 회개와 사과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물세례(13:24; 18:25; 19:3 ;막 1:4)와는 판이하게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일 뿐 아니라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된 세례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나머지 부분과 연관해서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1) 회개와 세례가 사죄의 요인(要因)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세례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디서나 죄사함 곧 구원은 오직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롬 4:1-17 ;11:6; 갈 3:8-9; 엡 2:8, 9). (2) 죄 사함의 근거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사용되는 전치사(에이스)는 '근거하여'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세례를 받으라. . . 너의 죄사함의 근거로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근거하여'란 의미보다 '의도나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3) '각각... 세례를 받고'의 구절을 삽입구로 취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회개하다'는 동사가 복수이고 '너희 죄 사함을 받으라'의 '너희'도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상의 난제를 피하기 위해 헬라어 본문을 의도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없다. 본문을 직역하면 '죄 사함을 위하여'란 의미를 지니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렇게 번역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본절에서 단순히 '세례 받으라'는의미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강조하여 이 이름과 세례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예수의 이름에 따른 세례가 강조된다. 이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어조이므로 단순히 '세례'라는 문자에 따라 본문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막 1:4은 본 구절 요약하듯 '죄 사함과 세례'를 밀접하게 연관(聯關)시켜 진술하고 있다. 비록 '세례'가 죄사함이나 구원의 근거는 될 수 없을지라도 본절과 같이 '예수만을 믿으라'는 의미를 지닐 때 그'세례'는 죄사함과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여기서 '그리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가 어떻게 번역되느냐에 따라 본절의 전체적 의미가 구분된다. (1) '그리고' 이 의미는 '카이'의 일반적인 용법이며 본절에서도 '그리고'로 번역될 수 있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 본구절과 앞구절은 단순히 대등적일 뿐 인과 관계가 없다. (2) '그리하면':이 의미는 '카이'의 특별한 용법이다. 이 번역을 취하면 앞 구절과 본 구절은 인과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회개와 죄 사함을 위한 세례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앞 문장이 명령문이므로 여기서 "카이'는 두번째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편 '성령을 선물로'란 표현을 직역하면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oirit, NIV ;성령의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체이시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그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고전 12 :11)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개역성경처럼 번역되는 편이 타당하다.
성 경: [행2:39] 휘민 가르 에스틴 헤 에팡겔리아 카이 토이스 테크노이스 휘몬 카이 파신 토이스 에이스 마크란 호수스 안 프로스칼레세타이 퀴리오스 호 데오스 헤몬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이 약속 -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며(1:4) 또한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약속로서(욜 2:28-32) 죄 사함과 성령의 은사(38절)를 포함한 것이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 베드로는 이 약속이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너희)과 그들의 자녀들(너희 자녀) 그리고 모든 먼 지방(나라)에 있는 자들(모든 먼 데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에서 '모든 먼 데 사람'이라는 표현을 장차 태어날 유대 자손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먼 데'(*, 마크란)라는 단어가 70인 역 (LXX)에서나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용어는 자연히 공간적(空間的)으로 핵석되어야 할 것이다(Richard N. Lingenecker).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때 '먼 데'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디아스포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Meyer, Wendt)이 이방인도 포함한 것인지(Bengel, Alford, Alexander, Knowling)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조금의 차별도 없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을 고려할 때 베드로가 여기에서 유대인만 지칭하고 이방인을 제의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너희'란 표현 속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포함되므로 '먼 데 사람'은 유대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누가는 본문의 '먼 데'라는 말을 22:21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2:40] 헤테로이스 테 로고이스 플레이오신 디에마르튀레토 카이 파레칼레이 레곤 소데테 아포 테스 게네아스 테스 스콜리아스 타우테스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 '여러 말' 이란 누가가 본문에서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베드로가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확증하며'(디아마르튀로마이)란 동사와 '권하여'(파라칼레오)란 동사에 접두어(prefix)로 덧붙여진 전치사들('디아', '파라')은 본래적 의미에서 파생되었으나 강조적으로 사용된다. 곧 이 전치사들은 마르튀레오('증거하다'), 칼레오('부르다')라는 원형 동사에 강의적(强意的)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R. N. Lonfenecker).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 당시의 세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에(눅 11:29; 17:25)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눅 9:41)요 '악한 세대'(마 16:4; 17:17)였다. 패역한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구약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창 7:22;19:24). 그러나 그러한 불신앙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그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마 21:41-44; 22:7; 23:24-24:2)
성 경: [행2:41] 호이 멘 운 아스메네스 아포덱사메노이 톤 로곤 아우투 에밥티스데산 카이 프로세테데산 테 헤메라 에케이네 프쉬카이 호세이 트리스킬리아이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이 말은 모든 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는 베드로의 '말'(톤 로곤)에 찬동하여 수긍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혹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확성기(擴聲器)도 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가 통틀어 25,000-30,000명에 불과했으므로 3,000명의 회개 사실을 부정했다(Haenchen). 이에 대해 롱게네커(Richard N. Longenecker)는 다음 두 가지 근거로 그 견해를 반박했다. (1) 그는 크라이슬러(B. C. Crisler)가 팔레스틴 지방에서 실험한 결과를 따른다. 즉 그는 팔레스틴에서는 설교자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소리의 반항음에 의해 수많은 무리가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마 예수도 이러한 지리적 입지를 고려해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는 '더하더라'는 동사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된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더해지는 수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설교의 결과로써 더해지는 과정이 계속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3,000명의 대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반응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보여준다. 따라서 3,000이라는 수효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한편 본 구절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학자에 따라 문제시된다. 왜냐하면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요단강뿐인데 베드로의 설교 장소는 예루살렘으로서 그만큼의 수효가 세례 받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다음 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다. (1) 3,000명이 일시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12제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례 받았을 것이다(H. Marshall, W. Neil). 즉 제자의 수가 점점 더해진 것처럼 세례도 점진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행해졌을 것이다. (2) 여기서 세례를 침례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굳이 약식 세례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3,000명이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을 누가는 보다 실감 나는 표현인 '세례'로 언급했을 것이다.
성 경: [행2:42] 헤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카이 테 코이노니아 카이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여기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사도'는 복수형이지만 '가르침"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주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각기 주어진 바 임무대로 가르침에 전력했지만 그 교훈의 통일성(統一性)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들(20:35)과 행하신 일들이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여기에서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기' 사이에 '그리고'란 접속사가 생략되었으므로 이는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 교제와 동격인 것을 보여준다. 교제(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과 영혼의 교통 곧 기도하는 일은(Bruce) 필수적이라 하겠다. 또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46절; 20:7; 고전 10:16; 11:23-25). 그런데 46절에서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에서 떡을 떼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성찬'(눅 22:19)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혀 힘쓰니라"는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어떤 행동 방침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교제했음을 의미한다(1:14; 6:4; 8:13; 롬 12:12; 13:6; 골 4:2). 그리고 이 말은 제자들이 '교제'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2:43] 에겐토 데 파세 프쉬케 포보스 폴라 테 테라타 카이 세메이아 디아 톤 아포스톨론 에기네토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 '사람마다"라는 말은 44절의 '믿는 사람'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수사법상 과장된 표현이다. 본 구절의 직접적인 의미는 '모든 혼에게 두려움이 되고 있더라'로 공포가 아니라 존경심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한다(막 4:41; 벧전 1:17).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기사와 표적들은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고후 12:12; 히 2:3-5). 이러한 증명을 위해 사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들을 많이 행했다(4:30; 5:12; 6:8; 8:6, 13; 14:3; 15:12). 그것들은 예수께서 지상에 있을 때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었던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 경: [행2:44] 판테스 데 호이 피스튜온테스 에산 에피 토 아우토 카이 에이콘 하판타 코이나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한 공동체 생활을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있어'란 미완료 과거형으로 신자들이 늘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전에는 구약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하나의 몸으로 결속(結束)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 백성으로 참된 교제를 했음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 '언약'(베리트) 언약을 맺는 당사자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속을 의미했다. 예수를 통한 신약의 공동체도 그 언약에 기초하여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결속될 뿐 아니라 공동체 간에 또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 간에 영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 때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지 성도의 수에 가입된 3,000명도 포함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 외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오순절 절기 행사가 끝난 후 자기들이 거주하던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려고 했고,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또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캄파넬라(Campanella)가 꿈꾸던 이상향과도 다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성령이 빠져 있으며 사랑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향은 원시 시대의 공동체 생활과 유사한 반면, 성령에 의한 공동체는 철저히 사랑이라는 원리와 언약이라는 결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유지된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성 경: [행2:45] 카이 타 크테마타 카이 타스 휘파륵세이스 에피프라스콘 카이 디에메리존 아우타 파신 카도티 안 티스 크레이안 에이켄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여기서 묘사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현상은 오직 성령의 하나 되심을 따라 이루어진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를 보여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공동체와 이 점에서 구별된다. 이방인 공동체에서는 결코 유무상통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사유 재산이 인정되었다(고전 11:21, 22).
성 경: [행2:46] 카드 헤메란 테 프로스카르테룬테스 호모뒤마돈 엔 토 히에로 클론테스 테 카트 오이콘 아르톤 메텔람바논 트로페스 엔 아갈리아세이 카이 아펠로테티 카르디아스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동인 공동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 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불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다(3:11; 5: 12).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제자들은 성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계속해서 모이기를 힘썼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방식과는 달랐다. 유대인 들은 대부분 율법의 형식과 그에 따른 관습에 의해 모였으며 제사를 드렸으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自發的)이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다(5:41 ;8:8; 11:23; 12:14; 13:48,52; 14: 17; 15:3, 31; 16:34; 21:17).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여기서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구절의 '집에서'가 헬라어 본문에서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카트 오이콘에서 전치사 '카타'를 어떤 의미로 취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상 차이가 생긴다. (1) 다른 집으로'로 번역될 수 있다(KJV). (2) 선택의 의미; '어떤 집들 중에 한 집에서'란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3) 장소의 의미; '집에서'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오이콘"은 단수이면서 관사가 없다. 이 말은 떡을 떼는 집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1)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지만 의미상 RSV 나 NIV 처럼 '그들의 집에서'(in their homes)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이 ' 그들 각자의 집에서' 란 의미로 표현된다면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성 경: [행2:47] 아이눈테스 톤 데온 카이 에콘테스 카린 프로스 홀론 톤 라온 호 데 퀴리오스 프로세티데이 투스 소조메누스 카드 헤메란 테 엑클레시아 에피 토 아우토 데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하나님을 찬미하며 - 이미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미는 자발적인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표현은 누가가 즐겨 사용한 표현으로서 신약 성경에서 9번 언급된 중에 누가가 7번 사용했다(본절; 3:8, 9; 눅2:13,20; 19:37; 24 :53; 롬 15:11).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 주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稱頌)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당한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이 구절에서 '주께서'란 말이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문법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받는 사람을'이란 말도 반복을 나타내는 수동태 분사로서 구원의 주체가 예수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더하게 하시니라'(프로세티데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더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에 대하여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생성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누가의 이러한 강조는 단지 성령 강림의 역사에 대한 첫 전주곡에 불과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로 계속될 누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되는 승리의 찬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민수기 8장 성경주석말씀] 레위인을 위한 정결 예식(민 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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