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14장 주일설교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7)

베들레헴 2022. 12. 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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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는 길과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길이며 천국의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세상의 재물과 권세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메시아입니다. 영원한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선택하여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7)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사이에 일어나는 거대한 전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사느냐? 죽느냐?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향하여 강요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우리는 선택에 대하여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인간은 매일같이 선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도 있습니다. 잘못 선택하면 대가도 따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하여 하나님께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스스로 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고민일 때가 있습니. 어떻게 택할 것인가? 그것이 매우 큰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 커다란 고민과 부담감 중에서 우리의 인격과 믿음이 성장합니다. 선택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 아니면 "아니"입니다. 그 중간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 중간을 원하시지도 말씀하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멸망의 문"과 생명의 문"을 말씀하셨습니.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라"였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8:35-36)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나니"(21:8)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각박하고, 절박하며 여유가 없느냐?는 항의와 불평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중간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임종을 지켜봅시다. 그 중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도무지 여유라고 하는 것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을 따라 살려는 마음은 죽음에 이르고, 영에 따라 살려는 마음은 죽음에 이르고, 영에 따라 살려는 마음은 생명과 평화를 누린다"(8:6)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은 우리는 이미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요1서 3:1) 즉 죽음에서 생명을 택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본질 즉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삶은 어디에서 오, 내가 사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과 건강과 선은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며 죽음과 질병과 죄는 하나님과 멀어질 때 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인의 싸움은 처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율법으로부터 오는 줄 알았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노예화시킨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실로 죽음과 생명의 대결은 무서운 것입니다. 살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는 이러한 절박한 선택이 앞에 있습니다. 죽음을 택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을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있지 않고, 생명을 택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죽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사망에서 옮기워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생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택할줄 모르는 신앙 때문입니다.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과 건강과 선은 교회에서 장시간 체류한다거나 오랜 기간을 출입한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며 그와의 깊은 대화입니다. 신앙은 율법이나, 계명이나, 아니면 가르침을 지키는 학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체와 결합입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그의 피조물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 그것은 전통적이고, 인습적이고, 상습적이며, 고루하고 틀에 박힌듯한 도덕 군자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오히려 예측을 불허하거나 생명 가운데 있는 신앙인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듯한 귀공자와 같은 그런 영상의 주님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과 질병 따위와는 거리가 멀고, 선과 생명과 건강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나 생명 가운데 거하시는 생명이십니다. 생명 중의 생명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나 새로운 피조물이셨습니다. 생명은 규격이나 틀이나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규제도 받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생명을 택하는 종교입니다. 이 생명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명 가운데 있으며, 생명의 피조물이 되는 데 있습니. 우리가 설교를 듣는 것은 생명을 택하는 일이며, 선교를 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신앙인들에게서 생명의 부재나 생명의 외면은 회개보다 생명의 선택을 촉구하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아무쪼록 생명을 택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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