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고린도전서 헬라어 성경강해] 고린도 교회의 당파 싸움(고전 1:10-17)

베들레헴 2022. 10. 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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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당파 싸움(고전 1:10-17)

 

=====1:10

형제들아 - 바울은 그의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기의 집필 목적에 따라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본론에 들어가는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반의어 접속사 ''('그러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됨)는 전체적인 흐름을 잘 표현해 준다. 즉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긴 어조이다. 바울은 종종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고전 7:29;14:20, Meyer).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님의 칭호(稱號)를 모두 다 사용한 것은 그의 호소가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지를 보여 준다(Morris).

너희를 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격려하다', '권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좀 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탄원하다'의 어조를 띨 수도 있다. 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이며 강한 권면을 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엿보인다.

다 같은 말을 하고 - '말을 하고'의 헬라어 '레게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엄격하고 고전적인 표현이다. '같은 말을 한다'는 표현은 정치적인 공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상호 간에 우호적인 관계에 있을 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이 이처럼 고전적인 헬라어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헬라 문화권에 친숙하게 젓어 있음을 알 수 있다(Robertson).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스마타'는 (1) 갈라진 틈(LXX 2:6;LXX 2:19,21) (2) 옷이 찢어짐(9:16) (3) 견의 차이로 일어나는 분쟁(7:43; 9:16) (4)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각기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한 분열을 가리킨. 즉 같은 교회 내에서 서로 느낌이 달라 당을 짓는 형편을 묘사한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온전히 합하라'의 헬라어 동사 '카테르티스메노이'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인데, 그물을 수선하거나(4:21)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정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살전 3:10).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의 온전한 통일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는 연합()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1:11

내 형제들아 - 이제부터 바울은 자신이 권면을 하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10절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내 헝제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비를 보여준다.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내게 들으니 - '글로에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클로에스'는 문자적으로 '글로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상업에 종사하는 여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Hodge).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집에 속한 종들이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바울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Grosheide).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면서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스'는 10절에서 말한 '분쟁'(스키스마타)의 결과로 의견이 분분하게 된 상태를 말하며 '말다툼'(quarrels, NEB, NIV) 혹은 '논쟁'(contenti-ons, KJV)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견해가 '심각한 차이'(serious differences, JB)를 보이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경멸하였다.

 

=====1:12

너희가 각각 이르되 - '너희가 각각'의 헬라어 '헤카스토스 휘몬'은 각자가 자기 입장을 취하였음을 시사하는 말로 분쟁의 문제가 얼마나 넓게 확산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들의 문제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는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은 분파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네 분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바울에게 -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 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고 웅변적인 사람(행 18:24-28;딛 3:13)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고전 3:1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로 보아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지식층의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곧 바울을 멀리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가 대립적이 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는 없다.

게바에게 - '게바'(케파스)'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게바'의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보기도 한다(Baur).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 심리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지도를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여 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에게 -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 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추측하건대 이 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파인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명한 것은 그곳에 당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러한 당파를 만든 그 정신을 책망하고 있다.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 ' 나뉘었느뇨'의 헬라어 '메메리스타이'는 완료시상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뉘어지셨고 지금도 회중 안에서 계속 나뉘어진 상태로 있느냐'라는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본절을 혹자는 단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다'라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achmann, Meyer). 그러나 이 문장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수사적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아무튼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당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을 무효화(無效化)시키며 그리스도만이 가지는 구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이 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오노마'는 전치사 '에피'(2:38)''(10:48)과 함께 쓰인 용법보다 강한 표현으로 영적인 결합의 상태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그리스보'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본절의 '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16:23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요삼 1:5, 6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Robertson).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에게만 예외로 세례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Morris). 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며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다.

 

=====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를 몇 사람에게만 베풀었던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보아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다(14).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시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성도들에게 말했거나 시도했다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였다(Morris).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다(16:17). ''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거처(居處)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눅 12:39) 본절에서는 가족이나 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말에는 그의 혈육 친척들과 종들까지도 포함된 것 같다(Mare)

그외에는...알지 못하노라 - '그 외에는'의 헬라어 '로이폰'은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란 뜻으로 '알지 못하노라'와 연결되어 바울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 바울이 고린도에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새로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이 겨우 교리 문답을 공부해야 할 단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아볼로(19:1)에게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례식을 거행하라고 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Mare). 어쨌든 본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진술한다(26:17, 18).

여기서 '복음을 전케 하려'의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의 복음 전하는 행위가 계속적이며 다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피아 로구'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헛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 없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지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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