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와 베드로(요 1:37-42)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게로의 전향하는 것을 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제3일에 택해지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첫 열매가 된다. 교회의 처음 시작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보라. 또한 위대한 일들의 새벽이 어떠했는지 보라.
Ⅰ. 세례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그리스도를 좇았다(37절).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데 21장 2절과 비교할 때 아마 도마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 자신으로 본다. 그는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며, 그이 태도로 보아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 같다(13:23; 20:3).
1. 그리스도를 좇는 두 제자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자. 그들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 이란 사실을 듣고서" "예수를 좇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 전날도 같은 소리를 요한에게서 들었으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수를 좇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같은 내용의 반복과 서적으로 개인적인 대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즉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써 이 대화가 그리스도를 좇게 만들었을 것이다. 현명하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강하고 거의 사로잡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요한이지만, 예수만이 죄를 짊어지신다.
2. 친절하고 세심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았다(38절). 그들이 그의 뒤를 좇았을 때, 그는그들을 알아보고 돌이켜 좇아오는 그들을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의 첫 행동과 하늘의 길을 걷는 첫걸음을 먼저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사 64:5; 눅 15:20 참조). 그는 그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야기했다. 한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란 이런 과정을 말한다. 시작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이런 질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의 대담함을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으러 온 어떤 사람을 책하려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수줍어하고 겸손해하는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와서,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청원이 무엇이냐? 너의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사람들이 묻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거룩한 종교를 전파하려 할 때에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 이냐?" 그리스도를따르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구하거나 자기를 구하거나 혹은 자신을 송이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선생, 통치자 혹은 화해자인가?" 만약 이 때의 우리 눈이 정직하다면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3. 그의 거처에 대한 그들의 가장 겸손한 물음을 보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1) 그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랍비란 뜻은 선생 즉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사들 혹은 학자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랍비란 말은, 선생, 위대한 사람 등등 많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랍비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써의 랍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 둘이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은 이 두 제자에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랍비로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계 5:9). 우리가 그들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는데 우리 자신을 맞기지 않는 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그와 더 친히 지기를 바라는 암시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지방에서 하나의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가 기거하는 숙소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자 그가 정하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 가려는 것이었다. 즉 알맞은 시기에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은 정중함과 좋은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와의 간단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했다. 그리스도와 어떤 친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부업이 아니라 주요 사업처럼 생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더 알려" 할 수밖에 없다.
② 그와의 "확고한 교제"를 원한다. 그들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의 교훈을 들으려 했다. 그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좋은 바람이며, 그와의 친교를 장려하는 말이다.
(1) 그는 자기 처소로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의 아름다움과 우월성을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멀리함으로 자기 세력을 유지하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존경과 매력을 맡기고, "내가 거하는 초라한 숙소를 와서 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오지는 말라. 나를 따르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는지 와서 보라"(마 8:20 참조)고 말씀하셨다.
(2) 그는 이 제자들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그들은 좀더 좋은 때에 그를 시중들려고 그의 거처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즉시 와서 보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결코 없다"라고 말했다.
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쇠는 달았을 때 쳐야 한다.
②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현재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현명하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5. 기쁘고 감사에 넘쳐 그들이 초대를 수락했다. "그들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가서 보았고," "그날을 그와 함께 거했다."
(1) 그들은 즉시 그와 동행해, "그의 거처를 가서 보았다." 은혜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즉 다윗처럼 한다(시 27:8). 그들은 그와 어떻게 기거할지를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했을 것이며, 그들이 알고 있는 최대로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2) 그들은 "그날을 그와 같이 기거한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주님, 여기가 좋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환영했다. 이 때가 제10시경이었다. 흑자는 요한이 로마의 계산에 따라서 그때를 아침 10시로 모았으며, 그들은 그와 밤까지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계산에 따라서 말한 것으로 보고, 그 때가 오후 4시이며, 그들이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기거했다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그다음 날이 안식일이며, 안식일 전날에는 집에 갈 수 없으므로 지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이익과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신앙, 사랑, 헌신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그들의 안식일을 보낸 축복받은 자들이다. 참으로 안식일은 "인자(人子)의 날," 즉 주의 날이다.
Ⅱ.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갔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처음이라면 카토릭 교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안에서 후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레가 먼저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는 영예를 획득했으며,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도구 역할을 했다.
1. 안드레게 베드로에게 준 "정보"를 보자.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았다." 즉 베드로를 두루 찾았다. 시몬은 안드레와 함께 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따라다녔으므로 안드레는 시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안드레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같은 시간에 그의 친구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것이다. 안드레는 "먼저" 요한을 만나려고 왔던 시몬을 만났으나, 그의 기대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2) 안드레는 자기들의 경험을 시몬에게 말했다. "우리는 메시야를 보았다." 다음을 주시하자.
① 안드레는 겸손하게도, 그리스도를 만난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찾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그분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② 안드레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한다. 우리는 가치가 있는 진주와 참다운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문둥이들이 외치듯이(왕하 7:9)외쳤다.
③ 안드레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고, 그분은 이제까지 들은 그 이상의 사람이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그 말을 구약 성서와 비교하면서, 그분은 때가 찼기 때문에 온 아버지께서 보내라고 약속하신 그 메시아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드레는 "하나님의 증거를 명상함으로써," 이제까지 "그의 선생"인 요한이 말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시 119:99).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안드레는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근원이신 예수에게로 데려가 그를 소개했다.
① "자기"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 하나의 모범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찾아 주려는 특별한 관심을 경주해야 됨을 배운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보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그것은 안드레가 그날 그리스도와 대화한 결과이다. 은혜로써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증거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지고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한 것을 알았다. 은혜를 맛보면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도 같이 맛볼 수 있을 때까지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지만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환대"를 보자. 그의 형제 안드레의 권유로 온 베드로를 예수는 환영했다(42절).
(1)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다.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다 하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① 그렇다면 첫눈에 어떤 물음도 없이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다."
② 그러나 시몬은 보잘것없는 하찮은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가 꾸밈없고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강적인 은혜와 호의의 한 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한 예이다(출 33:17) 혹자는 이름의 특징을 주목한다. "시몬"은 "복종적"이란 뜻이요, "요나"는 "비둘기"란 뜻이다. 비둘기같이 복종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다.
(2) 그는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① 이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뜻하는 것이다. 또 새 이름은 어떤 관작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2:17; 사 62:2). 이러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수치를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택하셨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를 게바(번역하면 반석)라 하리라." 베드로는 천성이 딱딱하고 완고하고, 그리고 단호했던 것이 그리스도가 그를 "게바"(반석)라 부른 중요한 패를 겪지 않게 하려 그리스도에게 확고하게 하며, 동시에 그의 "형제들에게 힘을 주며,"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참으로 "게바"(반석)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들은 하나의 반석처럼 단단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한결같이 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를 반석처럼 만들 것이다.
[레위기 원어성경 강해] 속죄제와 속건제 제사의 규례(레 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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