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복음을 사수하여 전파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디모데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율법주의 신앙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을 비방하고 폭행하고 박해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때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때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율법주의에 빠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율법주의에 빠지면 사람을 정죄하고 폭행하게 됩니다. 거짓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오직 주님만을 섬기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2-20)
•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이 바울에게 직분을 맡길 때에 자격이 있어서 맡긴 것이 아니다. 그저 충성되이 여겨서 맡겼고 긍휼을 베풀어서 맡기신 것이다(고후 4:1 참조).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맡긴 것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충성되이 여겨서 복음을 맡겼으므로 맡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더욱 충성된 사람이 되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쓰신다. 느헤미야 7:2에 느헤미야 동생 하나냐가 위인이 충성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셨다. 변변치 않은 자들을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서 직분을 맡기셨으므로 직분을 맡은 자들은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되고 충성되이 그 일을 하여야 한다. 게으른 것이나 불충성은 악이요 죄이다. 충성된 사람이라야 자기가 맡은 달란트로 장사를 잘해서 배(倍)를 남긴다. 충성되지 못한 사람은 장사하여 이를 남기지 못하고 받은 그대로 가져오므로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는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직분을 맡긴 다음에 일심 정력을 기울여 충성하면 그 직분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을 직능(職能)이라고 한다. 그 직분에 대하여 감당할만한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또 인격을 능하게 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 일이 성공이 되어 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충성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 있는 것도 빼앗아 간다.
•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이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했다. 바울이 믿기 전에 지은 죄를 다시 기억하고 자기가 큰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한 것이다. 바울이 믿기 전에 성도를 핍박하고 훼방하고 폭행하고 감옥에 잡아 가두고 스데반을 죽인 죄를 늘 잊지 않고 회개하며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도 자신이 전에 이렇게 큰 죄를 범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이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 용서해 주었을 터인데 회개한 지가 여러 해 혹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왜 믿기 전에 지은 죄를 늘 생각하며 회개하였는가? ① 법적으로 사함 받은 죄를 늘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은 신앙의 밑거름이 된다. 그 거름(肥料)으로 인하여 영이 소생한다. ②자기를 부인하게 된다. 이것이 겸손의 비결이다. 교만하면 누구나 망한다. 고후 12:9-10에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너무 크므로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어 겸손하게 했고(고후 12:7 참조) 또 자기가 전에 지은 죄를 늘 회개하여 겸손해졌고 또 많은 환란과 곤고와 능욕을 당함으로 겸손해졌다(고후 12:10 참조) 전에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자기가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다.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면 주님이 가까와지고 영적 교통이 되며 영이 새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번 지은 죄를 열 번 회개하면 그만큼 유익이 많고 백번 회개하면 그만큼 유익이 크다. 다윗왕은 한번 지은 죄 때문에 밤마다 요가 젖고 침상이 뜨도록 회개했다(시 6:6 참조). 베드로는 일생동안 매일 새벽 닭 울 때에 일어나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죄인입니다”하면서 회개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의 영의 양식이 된다. 이것이 베드로를 일생동안 겸손하게 한 것이요 주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한 것이요 순교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회개한 것만큼 은혜를 받는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 것도 이 뜻이다(롬 5:20 참조).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알지 못하고 행한 죄는 적게 책망을 받는다(눅 12:47-48 참조). 그러나 알지 못하고 지은 죄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양잿물(독약)은 알고 먹어도 죽고 알지 못하고 먹어도 죽는다. 단 알지 못하고 지은 죄는 알고 지은 죄보다는 좀 가볍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지은 죄라도 늘 회개하며 애통하는 신앙을 가진 것이다.
•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렇게 자기가 악한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더 풍성하게 깨달아졌다.
•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라는 말은 신임할만하다는 뜻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마 9:13 참조).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고 했다. "괴수라는 것은 못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바울이"죄인 중에 괴수였다"라고 과거사로 말하지 않고 "괴수니라"라고 현재사로 말한 것은 과거에 죄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에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다(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라고 했다(엡 3:8). 그러면 바울이 왜 현재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는가?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을 붙들고 싸운 결과이다.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날마다 발견해서 그 들보를 제거시키는 일을 하는 자는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외부로(행동으로) 나타낸 죄보다 자기(사람) 속에 있는 죄가 훨씬 더 크고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란 형제가 행동으로 지은 죄요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 욕심 등의 죄악성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 외부로 나타난 도적은 멸(滅) 하기 쉬워도 자기 속에 있는 도적은 멸하기 힘들다는 말도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간음하는 여자를 끌어다 놓고 모세의 율법에는 이 같은 죄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가고 말았다(요 8:5-9 참조). 이것을 보면 속에 있는 죄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들보)를 붙들고 싸우는 자는 자기가 제일 큰 죄인인 줄 알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의 속에 있는 죄는 알지 못하고 자기 속에 있는 죄만 알기 때문이다.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좀 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힘을 많이 쓰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가운데 괴수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사십 년간 미디안에 가서 회개하여 수양을 했으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다. 아직도 모세에게 옛사람을 벗어야 될 것이 있다는 뜻이다. 모세도 다 벗어 버리지 못했는데 보통 성도들이야 벗어 버려야 될 옛사람이 얼마나 더 많겠는가!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하는 자리를 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낮은 자리에 처하는 사람이 되면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사울이 자신을 이스라엘 사람 중 제일 작은 자로 알 때에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셨다(삼상 9:21). 그러나 교만해질 때에 하나님이 내어 버렸다(삼상 15:17).
•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 중에 괴수 되는 바울이 멸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심이며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다.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맡겨 주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 1:17 만왕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야 말로 만세의 왕이시요 영원하신 왕이시다. 또 하나님은 세상 왕들을 다 심판하실 것이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뜻이다. 우리 구원은 유일신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왔고 하나님 한분이 주장해서 성취하고 완성하신다. 최종에 가서는 이 하나님께 영광이 있고 그만 존귀하시고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이 홀로 왕권을 가지고 시작하셨고 이루어 나가시다가 나중에는 완성하여 하나님이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종의 승리, 완전 승리인데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 같이 여기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했다.
이 경계는 아래 말한 선한 싸움을 가리킨다. 전에 디모데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서 살았다. 바울은 앞으로도 예언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라고 권면하였다.
예언은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데 특히 앞으로 행해야 될 말씀, 앞으로 이루어질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했다. 이것은 성경말씀(요한계시록)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8:5에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하니"라고 했다, 바울이 성경말씀 즉 마태 10:5-6 같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요즈음 예언한다고 하여 점쟁이처럼 당신이 어떻게 되겠다, 당신 속에 죄가 있다, 이 집에 마귀가 있다 하고 무당 점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화하는 것처럼 말씀을 해준다고 한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역사이다. 계시록이나 마태 24장 같은 것은 물론 말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행해야 될 성경 말씀은 모두 예언이다. 또 이대로 하면 복 받는다고 하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요 이대로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간다 이것도 예언이다.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디모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갔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디모데가 잘 따라갔기 때문에 바울에게 배운 복음의 말씀이 전부 디모데의 살과 뼈가 되어 디모데의 영적 인격이 많이 자라났다. 그리하여 디모데가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에 배운 바른 교훈, 정통 복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라는 것이 바울의 명령이다. 왜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되는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1:3-4 참조). 또 복음을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진리 운동을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과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받은 바른 복음으로 디모데가 만들어지고 신앙의 체계가 바로 섰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다른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싸우라는 것이다. 일시라도 진리를 양보하거나 다른 복음을 복종하면 패전한다(갈 2:5 참조). 다른 복음과 싸우지 않고 용납해 두면 마귀가 전체를 다 썩게 한다(갈 5:9 참조). 신 신학과 그릇된 신비주의와 세상 주의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온통 썩게 만들고 있다. 이 그릇된 교훈과 싸워야 되고 제거시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다 부패하고 만다.
또 신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은 보수 정통 신앙을 사수하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신 신학과 신비주의로 나가는 자들과도 종교적인 사업이나 활동을 같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들과 싸우지 않고 용납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보수적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만 전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신신학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용납하는 것이요 위하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는 자도 위하는 자라고 했다(막 9:40). 저들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되었다고 밝히면 그 사람들과 갈라지게 되고 같이 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손잡고 사랑하고 다 협력해서 복음 전도하면 일을 크게 하고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용납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사업은 크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리를 세워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참 교회는 세울 수 없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갈 5:9). 얼마 후에는 그 잘못된 교훈(적은 누룩)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전체에 다 퍼져서 교회가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예언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의 그 말씀의 지도를 계속해서 따라가면서 그 말씀과 반대되는 교훈과 싸워야 참 교회가 서 나가고 생명이 살고 영이 자라난다.
•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워나가야 승리한다.
착한 양심은 성도의 중생한 영이 쓰는 양심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착한 양심이 없다. 왜냐하면 착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을 받은 양심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그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선한 양심의 소리는 중생한 영혼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그릇된 것은 떠나고 옳은 것을 따라가는 소리이다. 성도의 영혼 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따라가는 것은 영감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심령 속 깊은 가운데서 영감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신앙을 가져야만 생명 있는 산 신앙이다. 그 영감의 소리는 큰 소리가 아니고 세미한 소리이다(왕상 19:11 참조). 성도는 첫째 말씀의 지도를 받는 생활이 중요하고(18절) 둘째, 영감에 의한 선한 양심의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인도는 은밀한 곳에서 받을 수 있다.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어수선한 곳에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 앞에 섰을 때에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면서 지나갔으나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고 다음에 지진이 지나갔으나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세 번째는 불이 지나갔으나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 지나간 후에 양심 속 깊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즉 가느다란 감동의 역사가 있었다. 이것은 심령 속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다(왕상 19:9-12 참조). 그것이 심령의 소리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그 세미한 영감의 소리를 붙들면 그것이 힘이 된다. 그 힘으로 나가면 승리한다. 양심의 소리에 힘을 얻어서 나가야 힘 있는 성도가 된다. 양심의 소리를 붙들지 못하면 힘이 없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착한 양심을 버린 사람은 믿음이 파선된 것이다. “파선”이란 깨어진 배(船)라는 뜻이다. 배가 깨지면 침몰된다. 그와 같이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깨져서 침몰되고 만다. 선한 양심을 버린 것은 옳은 것을 버린 것이므로 믿음이 아니다. 옳은 것을 버린 믿음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벼에서 쌀을 빼낸 것과 같다. 벼에서 쌀을 빼내면 겨만 남을 것이다. 옳은 진리가 믿음의 내용이요 생명인데 믿음에서 옳은 것을 버리면 껍데기만 남을 것이 정한 이치이다. 성도가 선한 양심을 버리면 생명력이 없어진다. 아무 힘이 없어지고 배가 파선되어 물이 들어오고 침몰되는 것처럼 세상에 빠져 망하고 만다. 선한 양심을 써서 옳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산 믿음이다. 삼손이 신앙 양심을 버렸으므로 머리 깎이고 눈이 뽑히고 포로 되어 맷돌 돌리다가 결국은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고 말았다.
•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자 중에 대표적 인물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이다.
후메내오는 딤후 2:17에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에 넘어갔다. 알렉산더는 딤후 4:14에 있는 구리장색과 같은 사람인 듯하다. 그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
사단에게 내어 준 것 교회에서 출교(黜敎) 한 것을 가리킨다. 고전 5:5에도 범죄자를 사단에게 내어 준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징계로 육체는 망했다고 했다.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징계의 목적은 그를 회개시키려는 것과 복음이나 교회에 훼방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데살로니가후서 히브리어 성경말씀] 적그리스도의 출현(살후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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