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헬라어 성경 고린도후서 말씀] 성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1:1-5)

베들레헴 2022. 2. 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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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바울이 쓰고 있습니다. 성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성도를 위로하십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십니다. 

 

성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1:1-5)

 

1절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 크리스투 이에수 디아 델레마토스 데우 카이 피모데오스 호 아델포스 테 에크클레시아 투 데우 테 우세 엔 코린도 쉰 토이스 하기오이스 파신 토이스 우신 엔 홀레 테 아카이아

성 경: [고후1:1]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문안 인사]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 받은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에 근거하여(9:15) 열 두 제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11:5;12:11;2:6, 7). 그런데 바울이 본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서신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 됨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14-7:4).

󰃨 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 서신의 공동 저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고린도에 파송되어 사역 감당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하였고(딤전 4:12;딤후 1:7;2:1),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하였거나 거의 실패했었다(고전 4:17;16:10, 11).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자 가장 절친한 동역자로서 자신과 함께 계속 사역해야 할 디모데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주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을 것이다(Harris). 또한 비록 과거에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 반대파로 인해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일이 있지만(고전 16:10,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디모데는 그들에 대하여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 서신의 서두에서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였으며(행 16:1, 2),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딤전 1:2;딤후 1:2),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절친한 동역자이기도 했다(16:1-3;2:19-22).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추천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한편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包括)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Tasker). 바울은 두 개의 고린도 서신이 고린도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읽히기를 바랐을 것이다.

󰃨 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Eqirus), 데살리(Thessaly), 갈시디스(Chalcidice)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Athens)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Corinth)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 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 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다쉬'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고(민 23:9;시 147:20),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제사장 직분의 삶이어야 했다(레 11:44;신 7:6). 신약의 성도는 성별 된 구약 이스라엘의 영적 계승(繼承) 자로서(벧전 2:9,10) 소극적으로 죄악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봉사해야 할 자들이다.

2절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아포 데우 파트로스 헤몬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성 경: [고후1:2]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문안 인사]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 본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로 불리는데, 이는 '주'(퀴리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것임을 고려할 때(아도나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절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본절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절이 고전 1:3에도 나오는데 이는 전통적인 헬라식 문안 인사말과 히브리식 문안 인사말을 결합한 바울 특유의 전형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은혜'(카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의 선재적(先在的)인 행위로, 받는 자의 행위나 자격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또는 '선물'이다. 특히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께 지우신 것을 의미한다(5:19,20). '평강'(에이레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1:7;4:7).

3절 율로게토스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호 파테르 톤 오이크티르몬 카이 데오스 파세스 파라클레세오스

성 경: [고후1:3]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라는 '칭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여덟 개의 축복 문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Barrett).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 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4:4)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인 것이다(벧전 1:3).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 자비의 아버지시요 -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압 하라하밈)라는 말로 시작한다(A. Marmorstein).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오이크티르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86:15;7:18).

󰃨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여기서 '모든'(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파라클레세오스)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8:35).

4절 호 파라칼론 헤마스 에피 파세 테 들립세이 헤몬 에이스 토 뒤나스다이 헤마스 파라칼레인 투스 엔 파세 들립세이 디아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헤스 파라칼루메다 아우토이 휘포 투 데우

성 경: [고후1:4]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본절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본 서신의 발신인인 바울 자신을 가리키며 넓게는 본 서신을 읽게 되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Barrett, Lowery). 본서에서 바울이 아홉 차례나 사용하고 있는 '환난'(들립세이)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8;2:4;4:17;6:4;7:4;8:2, 13).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15:19,20). 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절의 '위로하사'(파라칼론)'안위하다', `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14:19;16:19-26).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고 고백하였다. 한편 본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기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養)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벧전 4:10).

5절 호티 카도스 페릿슈에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 에이스 헤마스 후토스 디아 투 크리스투 페릿슈에이 카이 헤 파라클레시스 헤몬

성 경: [고후1:5]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그리스도의 고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Martin, 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고(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8:17).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 들린 여종을 낫게 해 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었다(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헬라어 성경말씀 고린도전서 강해] 예수님을 부르는 모든 성도들(고전 1:1-3)

 

[헬라어 성경말씀 고린도전서 강해] 예수님을 부르는 모든 성도들(고전 1:1-3)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원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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