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고난주간 설교말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죽음(막 27:1-10)

베들레헴 2024. 3. 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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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설교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가룟 유다의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에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저주받아 죽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도 예수님을 파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복신앙에 빠져서 세상의 정욕에 휩싸여 살고 있다면 예수님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죽음(막 27:1-10)

 

. 유다의 뉘우침 27:1-1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붙잡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사형 집행권을 박탈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부터 어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었다.

(1)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내린 선고를 빌라도가 시행하도록 그리스도가 빌라도에게 인도되었다(1,2). 그 당시 로마 저술가에 의하면 빌라도는 거칠고 교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으며 그의 억압 정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의 도구로 그를 이용했다.

1) 그들은 예수를 결박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흔히 선고받은 죄수들에게 하듯 그의 손을 뒤로 결박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인간에 대한 사랑의 줄로 묶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의 줄로 묶여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삼손이 자기의 결박을 풀었던 것처럼 이 결박들을 즉시 풀어버렸을 것이다.

2)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사 53:7) 같은 예수님을 끌고 갔다.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거의 1마일(1.6) 정도에 달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아침에 예루살렘의 거리로 그를 끌고 갔다.

3) 그들은 예수님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어져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구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의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계하게 되었다.

(2)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에게 그들이 지불했던 돈이 유다에 의해 다시 그들에게 반환되었으며 유다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목을 매어 죽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려 했을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리스도를 자기들에게 팔았던 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었다. 그러나 한참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끄나풀이었던 유다가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유다조차도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일에 도움이 되었다. 첫째,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왔었던 사단을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실례가 되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실례가 되었다. 둘째, 그리스도의 핍박자들에 대한 경고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1) 여기서 유다가 어떻게 뉘우쳤는지 살펴 보자. 유다는 베드로처럼 뉘우친 다음 믿고 용서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뉘우치긴 했어도 절망에 빠져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 뉘우치게 되었나 :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뉘우치게 되었다. 아마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수로부터 벗어난 다음 영광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수치를 당하고 자기에게는 돈이 생기며 결국 아무런 해도 없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의 선생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보다 오히려 행위의 결과로 그 행위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의 수단 속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 길과 같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쉽사리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죄악의 길로 가게 된 다음 사람들의 죄를 더욱더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유다는 스스로 뉘우쳤다. 그가 유혹을 받아서 자기의 선생을 배신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은 삼십 개가 매우 좋아보였을 뿐 아니라 번쩍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배신을 하고 나서 돈을 받게 되자 그 은 삼십 개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의 양심이 살아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던고! 그렇게 사소한 것 때문에 나의 선생을 팔다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한심할 수가! 그가 결박을 당하고 정죄를 받으며 침뱉음을 당하고 매를 맞는 것은 다 나 때문이다.

내가 그 악한 거래를 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그의 선생이 그에게 베풀었던 선을 기억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그 가책은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이제 그는 그의 선생의 말씀이 진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 죄는 곧 그 맛이 변하는 법이다.

그의 뉘우침을 보여 주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그는 받은 돈을 되돌려 주었다.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3). 지금 그 돈은 그의 양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그 돈을 좋아했던 만큼 그 돈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악하게 얻은 것은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 결코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는 법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배반하기 전에 뉘우쳐서 그 돈을 되돌려 주었다면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이제 두려움 속에서 돈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당하게 얻은 것은 제대로 간수될 리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얻기 위하여 범한 죄로 말미암아 계속 죄를 짓게 하기 위하여 범한 죄로 말미암아 계속 죄를 짓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돈을 준 사람들에게 그 돈을 되돌려 주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가 그의 거래에 대해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백을 했다. 내가 무죄란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 이 말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 무죄하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런 권고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한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무죄를 선언했다. 둘째, 그는 이 무죄한 피를 팔아서 죄를 지은 것에 대해 고백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하고 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가 이와 같이 뉘우치긴 했지만 그 뉘우침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그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긴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에게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하나님에게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하나님에게 가서 '아버지여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라고 말하지 말았던 것이다.

2) 여기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다의 속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너무나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들이 이 무죄한 피에 굶주렸고 또 그 때문에 유다를 고용하여 그 피를 팔게 했으며 이제 그 피가 흘려지도록 정죄한 것이 과연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을까?

그들은 유다의 죄를 너무나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유다가 '내가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우리가 너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네가 우리에게 너의 죄에 대하여 말하느냐"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 특히 우리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거나 관여하고 있는 그런 죄들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사리 변경되지 않는다. 만일 그 일에 잘못이 있다면 그들은 유다에게 그가 그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유다가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팔았기 때문이었다.

유다의 죄는 실로 '더 큰'(19:11) 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유다가 그리스도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한 그들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만일 그가 무죄하다면 너나 그것을 알고 있도록 하라. 우리는 그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했으므로 우리가 이처럼 그를 핍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악한 행동들은 사악한 원리의 지지를 받는다. 특히 죄는 죄를 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죄가 된다는 원리의 지지를 받는다. 이는 곧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 선한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다의 뉘우침과 두려움과 후회를 너무도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짓는데 있어서 유다를 기꺼이 이용했으며 또 그 당시에는 그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유다를 경시하여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완고할 정도로 회개치 않는 자들은 회개한 사람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유다를 함정에 빠뜨린 다음 그를 떠나면서 그에게 냉소를 던졌던 것이다. 뉘우치고 있는 죄인들은 그들의 옛 동료들이 죄에 빠져 있으며 아무 위로도 주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반역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3) 유다는 이로 말미암아 극심한 절망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더욱 절망하게 되었다(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대제사장들은 돈을 받음으로써 모든 죄를 떠맡지 않기 위하여 그 돈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다는 자기가 그돈을 갖고 있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워 그 돈을 간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대제사장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 돈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도록 그 돈을 성소에다 던졌다.

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일은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루어졌다. 그는 '물러갔다'. 즉 그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던 것이다. 절망에 빠져 홀로 있는 사람에게는 화가 미치는 것이다.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나 그의 일부 제자들에게 찾아갔다면 그의 죄가 악하다 해도 그는 구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사형 집행인이 되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죄를 보고 깨닫긴 했으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죄는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데 있지 않고 가인처럼 그 스스로 자기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데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다가 그의 선생의 피를 팔았던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단념함으로써 더 많은 죄를 범했다고 했다. 그는 양심의 불길을 회피하기 위하여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안락을 구하기 위하여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우리는 유다의 이 행동을 통해 사단이 들어갔던 사람들 특히 돈을 사랑한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둘째, 우리는 유다의 이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실례를 대하게 된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준엄하신 모습을 대하게 된다. 셋째, 우리는 유다의 이 행동을 통해 절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한 실례를 대하게 된다.

절망은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죄를 악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전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도움을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일부의 불신앙적인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자살은 아무리 심한 병에 걸렸다 해도 그 병보다 더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구제책에 불과하다.

4)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도로 가져온 돈을 처분했다(6-10). 그 돈은 '토기장의 밭'이라 불리우는 밭을 사는 데 사용되었다. 이 밭은 나그네를 위한 묘지가 되었다. 그들이 '나그네의 묘지'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들의 박애정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실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일정한 장소에 나그네를 묻고자 한 것은 그들의 겸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그네들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들과 멀리 떨어져서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윤리는 그대로 무덤에까지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토기장이의 밭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구입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곧바로 베드로가 이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 때문이다.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그 돈을 성전 금고 혹은 고르반에 넣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돈으로 배신자를 고용했었던 것이다. 그들은 피값으로 쓰인 그 돈을 성전 금고에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신자를 고용하는 것이 창녀를 고용하는 것과 비슷하며 행악자에 대한 가치를(그들은 그리스도를 이러한 사람으로 여겼다) 개의 가치와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중 어느 것도 '여호와의 전에 가져올 수'(23:18) 없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켜 버리는 자들이었다(23:24).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할 일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위하여 묘지를 마련해 주는 공적인 선행을 베풂으로써 자기들의 한 일을 속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그네와 이방의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피값을 통해 이방인들이 죽고 난 후 휴식처를 얻게 되었다. 그 묘지는 토기장이의 밭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셨다. 그리스도께서(그 밭을 산 사람처럼) 그밭에 대한 소유권을 변경하였으므로 이제 죽음과 묘지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침상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사고 판 자들의 비행을 영속시키기 위함이다. 이 밭은 흔히 '아겔다마' '피밭'으로 불렸다. 이 말은 그 묘지에다 자기 자신들의 죄에 대한 기억을 함께 묻고자 했던 대제사장들에 의해 불려진 것이다. 그들은 그 밭에 대한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고치지 않고 계속하여 사용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9).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11:12) 속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말씀이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느냐 하는 것은 하나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고대의 수리아 역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고 단지 '선지자로 말씀하셨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에게 임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쨌든 스가랴 선지서에서 비유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돈의 총액은 '은 삼십'으로 서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그의 고가를 삼았으며'(11:12) 또 이 은 삼십은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졌다(11:13). 이 말씀은 여기에서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해 정가 된 값을 그가 아닌 토기장이의 밭을 사기 위하여 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상당히 높은 값으로 정해져야 한다. 그는 '오빌의 금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고'(28:16) '돈으로 산' 말할 수 없는 선물로도 그 값이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매우 낮은 값으로 정해졌다. 이스라엘 자녀들인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그리스도를 과소평가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값을 쓸모없이 버려진 땅으로 보이는 토기장이의 밭을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의 값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서에는 '그 값을 토기장에게 던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귀중한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고 보잘것 없이 초라한 행상인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왕의 몸값을 치렀으며(참조. 21:32) 그것도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필요한 값 정도로 밖에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바대로 된 것이었다.

[누가복음 고난주간 예수님말씀] 예수님의 가상 칠언 말씀(눅 23: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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