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부활 주일 설교말씀] 의심 많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요 20:19-25)

베들레헴 2024. 3. 2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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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부활 주일 설교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는데 도마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요 20:19-25)

 

.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20:19-25)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확고한 증거는 '그가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1:3)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제자들의 모임에 최초로 모습을 나타내신 것에 관한 설명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부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셨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소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심을 눈으로 직접 목격시키기 위해 친히 그들에게로 오셨다.

1.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제정하신 세 가지 보조적 규례들이 있다.

이세 가지 보조적 규례들은 거룩한 제반 신앙 집회들, 그리고 목사직에 관한 것이다. 이 보조적 규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의 나타나심에 관해 기록된 이 본문에 명시되어 있다. 즉 첫 번째 두 규례는 19절에, 다른 하나는 21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1]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자들에 의해서 준수되고 우리 주 예수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방문하신 날은 주의 첫날이었다. 그리고 주의 첫날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로 날이나 달, 그리고 해를 표시한 곳은(필자의 견해로는) 신약 성경 속에서 부활에 관한 기사 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날은 신앙적으로 엄숙해야 할 날로 수차례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실상 하나님이 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제자들이 엄수하고 주 예수께서 승인하신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보게 된다. 아마도 제자들은 일종의 신앙 훈련, 즉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였던 것 같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를 격려하며 현재의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모였다. 이 집회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집에서 모였으며,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문을 잠갔다.

그리고 그들은 아는 사람 외에는 결코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폭풍우 속의 양 떼들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양이 군거성동물이기 때문에 다시 모이듯이 그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집회가 구석진 곳으로 몰려나거나, 강제로 광야로 추방당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골방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닫아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셔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20-23)

그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오셨다. 그의 이름으로 두세 명이 모인 곳에 그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 그는 문이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오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엄숙한 집회를 비밀리에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잠긴 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출현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제자들에 대한 그의 친절하고도 친근하신 인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19). 이 말씀은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는 말씀은 '온갖 축복이 너희에게 임하기를 혹은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온갖 평강이 너희와 항상 함께 하기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유산으로 그의 평강을 남겨 주셨다(14:27). 그는 본문에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유산을 신속히 유효케 하신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너희 양심에 평강이 있으라. 너희가 서로 화목 하라. 이 모든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그러나 세상과 화목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라." 그들 가운데로의 그리스도의 급작스런 출현은 그들에게 일종의 혼란과 당혹 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의 술렁거림을 진정시키셨다.

[2]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게 나타내신 그리스도(20):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자.

1) 그가 부활의 진실성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취하신 방법: 그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그의 육체의 상혼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결코 없다. 주 예수의 상혼들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 상혼들은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이 입은 상혼을 영광으로 여기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입으신 상처들은 그가 곧 죽으신 바로 그 분임을 세상에 웅변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상처를 지니신 채로 부활하셨다. 또한 그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실 때에도 그 상혼들은 호소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상혼들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다.

그는 제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 상처 자국들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전의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예전의 그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된 것에 대해 기뻐했을 뿐 아니라, 상혼과 같은 그러한 특별한 흔적을 통해 더욱 확실한 증거를 대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손바닥의 상처를 보여주시기 위해 손을 펼쳐 보이셨다. 그리고 가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가슴을 열어 보이셨다. 영광을 입으신 구속 자는 그의 모든 신실한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위해 언제라도 자신의 손을 펼쳐 보이시고 가슴을 열어 보이실 것이다.

2) 그 상혼들이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 제자들은 그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이 약했던 기간 동안에는 그들이 받은 위로가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은혜를 통해서 그 위로가 실제적이고 견실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연후에 제자들이 기뻐하였다. 본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을 어느 정도 황홀감과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술한 것 같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는 너무도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겠는가! 그 사건은 그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활력소였다. 이제'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다'(요 16:22)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거두어 갔다.

[3]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교회를 세울 대행 자로 위임하심(21).

1) 그들의 위임을 위한 서언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앞서 언급되었던 인사가 엄숙하게 반복되고 있다. 앞에서의 인사는 그들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킴으로써 그들로 부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킴으로써 그들로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조용히 경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사는 그들의 기쁨으로 들뜬 분위기를 무마시킴으로써 이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조용히 경청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 서언은 그가 수여하신 위임을 그들이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들을 격려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게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그들에게 그 평화를 주실뿐만 아니라,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도록 그들에게 당부하셨다.

2) 위임의 내용: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실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파송하셨는가를 이해아기란 쉬운 일이다. 즉 그는 그들에게 세상에서 자신이 행하였던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을 지시하셨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시켜 파송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도들, 곧 파송받은 자들로 불린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하신 것처럼 그가 제자들을 파송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들이 받은 위임과 권능은 그가 받으신 위임과 권능에 비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물려주신 것을 계속 추진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하여 파송받으셨듯이 그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파송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화해의 중보자들로서가 아니라 화해의 설교자이자, 선포자로서 파송받았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가문 중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파송하셨듯이 그리스도 역시 그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하실 권한을 지니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그들을 파송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계셨으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권위로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과업을 위해서 비교할 수도 없는 권한과 형언할 수도 없는 능력을 구비하셨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과업을 위하여 그러한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한 말씀은 그의 권능이 제자들에게서 재현됨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에게 주어진 중보자로서의 권위에 힘입어 제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활동할 권위를 수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자는 곧 그를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결과가 되며, 이는 결국 그들을 파송하신 분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결과가 된다(13:20).

(4) 그들의 자격(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1) 그가 취하신 상징: 그는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셨다. 이는 그가 실제로 살아 계심을 이 생명의 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로부터 받게 될 영적인 생명과 권능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전능 자이신 하나님의 숨이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옛 세계를 시작하셨듯이, 위대하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숨도 그의 사역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새 세계를 시작하셨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그리스도의 생기이다.

하나님의 숨은 그의 진노의 권능을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의 숨은 그의 은혜의 권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진노의 숨이 사랑의 숨으로 변화된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사이다. 사도들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대행 자들로서 성령을 전달하는 임무만을 담당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숨을 내쉼으로써 성령을 수여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 은사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2) 그가 엄숙하게 성령을 수여하심: 서령을 받으라(22). 첫째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신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성령으로 감싸주시며 필요한 모든 능력들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신다. 둘째로 여기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의 양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믿음이 생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이제 그들이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 너희 안에서 용기가 생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전하신다.

(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수여하신 한 가지 특별한 권능이 본문에 상술되어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이러한 권능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결과로써 수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특별한 판단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그들은 그러한 권위를 위임받기에 적합하지 못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죄 사함의 은사는 교회나 그 사역 자들에게 부여된 일반적인 특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 은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신실한 청지기들로 하여금 그들이 파송되어 전파해야 할 복음을 고수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도 구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사면의 법령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그의 복음 통지 자들을 파송하신다. 복음이 사면하는 사람들은 사면받게 될 것이지만, 복음이 정죄하는 자는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목회의 명예를 무한히 고양시키고 목회자에게 무한한 용기를 가져다준다. 외사함에 관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음의 두 가지 권위 있는 원칙에 의거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1) 건전한 교리에 입각한 원칙: 사도들은 복음 이외의 다른 방편으로는 결코 구원이 성취될 수 없음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위임받고 있다. (2) 엄격한 계율에 입각한 원칙: 복음의 보편적 규율을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함으로써 죄 사함을 결정한다.

3. 도마의 불신(24)

이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출현의 계기가 된다.

(1) 도마의 부재(24): 그는 비록 현재 열한 명이지만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때 그들은 열 한 명에 불과했으며 그중 또 한 명이 부재중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있을 천국 총회가 열릴 때까지는 결코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할 것이다. 도마는 그때 불참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것에 대해 기쁨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2)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함(25): 그들은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라고 말했다. 당시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잇지는 아니하였지만, 그가 그리 먼 곳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불참했다고 해서 영원한 변절자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도마는 유다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우리가 주를 뵈었소. 자네도 같이 있어서 그를 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그 자리에 없었던 자들에게 다시 들려줌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경험했던 것을 전해줌으로써 서로 상대방을 그들의 가장 거룩한 믿음 안에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뵙고 그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역사하신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다만 오만하게 떠벌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3) 그 증거에 대해 도마가 제기한 반론: 그는 "나는 그의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며 또한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그를 거칠고 까다로우며 성마르게 말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한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꼭 같이 좋은 성격을 지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여기서 많은 과오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도마는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유의하지 않았거나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그의 동료 제자들의 증언에 각별한 경의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그들 열한 명 모두가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의문을 품은 점은 그들의 정직함이 아니라 그들의 경솔함이었다. 즉 그는 그들이 너무 쉽게 믿어버린 점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방법으로 믿으려고 했거나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시험했다. 도마는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만져봄으로써 얻는 증거를 통해서만 믿기를 고집했다.

또한 그는 그 사실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면전에서 도마의 이러한 공개적인 공언은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또한 그들을 낙담시켰다. 한 사람의 겁쟁이가 많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들 듯이, 한 사람의 불신자 혹은 회의론 자도 역시 그러한 영향을 끼친다. 도마는 자신의 불신을 매우 단호하게 선포하였으므로 나머지 제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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