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3장 성경 주석강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요 3:22-36)

베들레헴 2024. 3. 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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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성경 주석강해 설교말씀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요 3:22-36)

 

.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22-36

1.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으로 가심(22)

예수께서는 공적인 사역에 착수하신 이후 많은 곳을 다니셨으며 자주 이동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영혼들에게 선을 행하시기 위해 수없이 발걸음을 재촉하셨던 것이다. 이른바 의의 태양이 그 빛과 온기를 전하기 위해 온 지구를 도는 것 같았다(19:6).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우래 머무시지 않곤 하셨다. 이 후에, 즉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신 후에 좀 더 많은 개인 생활을 보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많은 일을 하시고자 예수께서는 유대땅으로 가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신 기적은 아마도 뉴스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소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서 어떤 선도 베푸시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유대땅으로 내려 가셨을 때 그 제자들도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스도와 동행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그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례를 베푸셨다. 세례 요한 역시 유대땅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곳에서 베푸시기 시작하셨다(3:1). 그러나 손수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으로 나타난다(4:2). 거룩한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비록 연약한 인간의 손을 거쳐서 시행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시는 것임에 분명하다.

2. 요한의 꾸준한 사역(23-24)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한 꾸준히 자기의 업무에 충실했음을 볼 수 있다.

(1) 요한은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는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양자는 전혀 충돌이 없었으며 서로 서로 방해하지도 않았다. (1) 하나님의 일이 순조롭게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옥에 갇혀 세례 베풀기를 중단하게 되기 전에 전도와 세례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일군들에게는 자기들이 자리를 대신하여 채우게 될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는 사실이 매우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전도와 세례의 일을 개시하셨지만 세례 요한은 계속해서 세례와 전도의 일을 수행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아직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맞이할 철저한 준비가 회개에 의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그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실 때까지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계속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소유하고 있지 못한 더 큰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필요 없게 한다거나 소용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손이 수고해야 할 만큼 일은 충분하다. 다른 사람이 자신들보다 훨씬 은사가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한쪽에 자리잡고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침통한 일이다.

(2) 세례 요한은 살렘 근처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지명은 어느 곳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장소이다. 그 장소가 어느 곳이건 간에 요한은 이곳저곳으로 장소를 이동했던 것 같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따라야 한다. 세례 요한은 물이 많은 장소 즉 물줄기가 많은 지역을 선택했다. 그것은 그가 물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느 곳에서나 즉시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말씀은 요한과 예수 양자를 공히 지칭한다고 본다. 즉 어떤 이들은 예수께 나와서, 어떤 이들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세례는 하나였으며 그 두 사람의 마음 또한 그러하였다.

(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24). 세례 요한은 그의 몸이 자유로운 한 자신의 사역을 결코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3.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 간의 결례 논쟁(25)

(1) 논쟁을 벌인 사람들 :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 몇몇과 요한이 베풀고 있는 회개의 세례에 승복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회개한 사람들과 회개치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다. (2) 논쟁의 주제 : 문제화했던 논쟁 주제는 결례 즉 물로 씻는 종교적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 즉 그의 결례에 대하여 옹호를 하고 그 세례나 결례가 유대인의 모든 결례를 완전케 하는 것이요 대신하는 것이라는 논거를 제시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제자들은 옳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유대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 여태껏 시행되어 왔던 결례에 아주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지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 중에 유대인들은 요한의 세례의 우수성과 그 탁월한 의미를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리스도의 세례를 끌어들여 요한의 세례에 대한 반론의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 반론이 여기(26)에 나타나는 불평의 촉매가 되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론의 제기는 복음의 증진과 확산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는 마치 어린 시절이 성인 시절과는 상반되어 있으며 상부 구조가 그 토대와 상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상충할 이유가 없다. 그 둘은 서로 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4. 요한의 제자들의 불평(26)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세례에 관하여 자기들의 스승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 제자들은 스승에게 와서 말한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얘기는 마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의식을 처음으로 제정한, 말하자면 요한이 그의 발명품에 대하여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를 제정하여 베푸는 것이 주제 넘은 일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가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의 주장은 그 일이 요한에 대하여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증거해주신 그자가 세례를 줍니다." 이는 마치 예수의 모든 명성이 세례 요한이 나눠 준 명예의 덕인 것으로 보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는 않으셨다(5:36).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으로부터 받기보다는 요한에게 더 큰 영예를 비추셨다. 요한은 그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하여 공정하였다.

그리고 요한의 증거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역시 요한의 사역을 빈약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풍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를 전체적으로 가리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광과 존경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은 어느 시대에나 교회의 파멸의 원인이 되어 왔으며 교회 구성원이나 사역자들의 수치의 대상이었다. 만일 우리가, 한 사람의 매우 풍성한 은사와 은혜 그리고 수고와 솜씨가 신실한 믿음으로해서 자비를 얻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고 멸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시고 고용하시고 곤귀케 하시는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 하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5. 요한의 답변(27-36)

그렇게 되는 것은 세례 요한을 결코 동요시키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바로 요한이 바라던 바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 불평자들을 제지시키고, 이 일을 이전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했던, 자신보다 훨씬 앞서 계신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증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1) 여기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낮추고 있다(27-30).

1)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처분에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하나님의 섭리의 지시에 따라 서로 다른 직책이 주어지게 되는 법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가 주어지는 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은사, 더 쓸모 있는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시기해서는 안된다. 세례 요한은 그 제자들에게 만일 하늘에서 그가 받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그렇게 자기보다 낫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키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주셨다면, 어찌 그들이 그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기를 주저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은사나 역할에 있어서 가려진다 할지라도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기 때문임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혹 지금이라도 그가 쇠하게 된다면 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고 시대의 뒤에 쳐져서 만족스럽게 예수의 흥하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2)세례 요한은 얼마 전에 자신이 그리스도에 관하여했던 증거를 강조한다(28). "내가 되풀이 하여 말했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나는 그리스도 앞에 보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제사장들의 눈총도 자기 제자들의 아첨도 그의 이미 한 말을 변경시킬 수 없었다. 요한의 재 확정은 첫째로 불합리하게 불평을 늘어놓는 자기의 제자들에 대한 꾸지람이었다. 요한이 말했다. ", 내가 증거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잊어 버렸느냐?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지 않더냐? 나는 단지 그분 앞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더냐? 왜 너희는 내가 옆으로 비켜나 그분에게 길을 열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느냐?"

둘째로 요한의 이러한 말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와 경쟁하여 옹립하도록 하는 기회를 전혀 준 적이 없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요한은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이 그러한 실수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주고 있다. 요한은 불평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 메시아라는 소망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부당한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변명의 한 가지는 사람들이 속으면 그대로 두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직무를 행함에 있어 사람들을 속이지 않고자 하려는 사람들에겐 극도로 좋지 못한 격언이라 하겠다.

3)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흥왕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그것을 기뻐하였다. 이 사실을 요한은 멋진 비유를 들어 표현하고 있다(29). 요한은 우리의 구세주를 신랑에 비유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간다고? 그것은 신랑의 권리이다." 신랑이 신부를 취하듯 각 영혼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에게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식을 집행할 때 신랑을 도와주고, 신랑을 위해 좋은 말을 해 주고, 신랑이 신부를 취할 때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신랑의 친구에 비유하고 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29).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란 신랑의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신랑의 친구, 신랑이 구애할 때 대신 가서 편지와 소식을 전해 주는 신랑의 친구와 같은 것이다.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즉 그로부터 지시를 듣고 그의 명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영혼을 그리스도께 맺어 주는 일이야말로 모든 선한 종들의 큰 기쁨이라 할 것이다. 확실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4)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명망과 세력이 흥해야 하며 자신의 멸망과 주장은 감소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대단히 필수적이요 적합한 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 요한은 그리스도의 흥왕에 비한 자신의 쇠퇴는 매우 정당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며, 자신에게 아주 흡족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왕국이 땅 위에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리라. 메시야의 왕국은 아침 햇살이 대지에 퍼져 나가듯, 겨자씨 한 알이 무성하게 자라 나가듯, 성장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영향이 파급되어 요한 자신의 세력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나 요한은 쇠하여야 하리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는 모든 다른 영광의 빛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아침 햇살이 대지에 점점 비취 오면 새벽별의 빛은 점점 사라져 가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우리가 어떤 것이 되든, 전혀 아무 것도 못되든 기꺼이 만족해야 한다.

(2)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어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다.

1)그리스도의 인격의 존엄성 :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3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 즉 그리스도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오셨음을 상징한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만이 하늘의 뜻이나 하늘로 가는 길을 가장 정확히 바르게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추론해 내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위에 계시며, 모든 인간과 피조물 위에 뛰어나 군림해 계신 분인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의 존귀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다는 이 사실만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비교했을 때 견주어지는 이들의 비천함에 의거하여 요한은 계속해서 이 점을 예시하고 있다.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있는 것으로 교제하며 그 관심도 땅에 있는 것에 국한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다른 인간들과 동일한 그릇으로 빚어졌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안에 풍성한 보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단지 세상에 속한 그릇일 뿐이었다.

2)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탁월성과 확실성 : 세례 요한 그로서는 땅에 속한 것을 말했으며 땅에서 난 사람들은 모두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인간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오직 땅에 속한 것만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견주어 불 때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 자신의 가르침은 차원이 낮은 것이요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늘이 땅 위에 높이 있듯, 그리스도의 사상은 저들의 생각과 사상 위에 뛰어난 것이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이제까지 지구 위에 살았던 모든 선지자들 보다 뛰어난 분이시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오류가 없이 틀림없다고 확실하여 따라서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했다(32절). ㉠그리스도의 신적 지식 :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가 보고 들었던 것 만을 증거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셨던 신적 본성은 그가 본 것이다. 즉 그가 드러낸 하나님의 마음은 곧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금방 들었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것은 금방 들었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것은 꿈과 환상으로 그들에게 알려진 사실들이었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학에서의 가정이나 기발한 개념과 같이 의심스러운 독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의 계시이며 그 자체가 영원한 진리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선하심 : 그리스도의 설교는 여기에서 증거라 불리고 있다. 이 증거란 말은 납득할 만한 근거 자료란 말이다. 이는 풍문으로 들은 소식을 기록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 제출할 증빙 자료로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그 사실을 사랑으로 진지하게 전달해 준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관련된 사실을 보고 듣고 기꺼이 우리에게 알려 주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렇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으려 하지도 않으며 듣지도, 신뢰하지도 않으려 한다. 요한은 이 사실에 대하여 기이히 여길 뿐 아니라 슬픔의 사실로 말한다. 이같이 요한의 제자들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로 간다고 한탄했으며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6). 죄인들의 불신앙은 성도들의 슬픔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선택된 남은 자의 신앙에로 눈길을 돌린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33).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보증을 받으실 필요가 없다. 오히려 믿음으로 우리는 그 진리에 기꺼이 동참하여 존귀와 공의를 돌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예와 아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들을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관하여 하신 모든 약속에 대하여 그분께서 신실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에 신실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더욱 기꺼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교훈이 신적 교훈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셨다. 그의 본체도 언어도 신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음을 입증하셨으므로(2:2) 그리스도의 말은 하나님의 말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전에 그 어떤 선지자들도 한 적이 없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물론 성령의 역사로 말했으나 그 정도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정도껏 성령을 주셨으나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 주셨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작은 그릇에 담기듯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 안에 담기듯 끝없이 그 깊이를 모르는 대양 안에 담기듯 계셨던 것이다.

3)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권세와 권위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35). 선지자들은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비천하게 된 상태에서도 그에게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하셨으며, 그가 곤핍할 때도 고난을 당할 때도 결코 모자람이 없이 그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이시다. 아버지께서 만유를 그의 손에 주셨다. 사랑은 아낌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주셨다. 마태 복음에 설명된 대로 하자면 모든 권세를 주셨다(28:18).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상속 재산으로 물려받은 모든 육체와 이방인들까지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왕권을 상징하는 찬란한 금빛 홀과 철장이 그의 손에 주어져 있다. 모든 은혜도 전달의 통로로서 그의 손 안에 다 들어와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러한 권력과 은혜를 우리의 손에 쥐어 주시기에 우리는 너무나 무가치하다.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합당하신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 주셨다. 그러한 권세와 은혜는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져서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손에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확실하며, 그렇게 친절하며, 그렇게 선하신 그리스도의 손 안에, 우리를 위해 그러한 권세와 은혜를 받아 놓으신 그분의 손안에 새 계약의 풍성함이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행복의 위대한 조건인 믿음의 대상이시다 : 아들을 믿는 자의 영생이 있고(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이 말이 곧 이글 전체의 결론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온갖 좋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 전달하시고 베풀어 주신 것처럼, 그 증거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러한 후의를 받을 수 있으며 나눠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방법이 곧 주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의 요체이다.

첫째,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의 상태 :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 그리스도께서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그를 믿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 곧 그를 신임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기독교의 축복은 영원한 생명이다. 진정한 신자는 지금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앞으로 영생을 얻게 될 뿐 아니라 바로 지금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한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졌고 그 아들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은혜는 이미 시작된 영광이다.

둘째, 불신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파멸이다.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없으며 장차 올 세상에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즉 그렇게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시기 위해 오신 그 생명, 즉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상태란 비참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마태복음 신약 성경 읽기]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마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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