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기독교 복음에 관한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 가장 위대한 메시지

베들레헴 2024. 3. 2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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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독교 복음에 관한 설교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 외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 가장 위대한 메시지

 

복음의 영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일하고 계시고 이미 행하신 일을 선언한다는데 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복음이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였으며 선언하였으며 발표하였다. 그들은 먼저 삶과 인생을 위한 계획을 개요적으로 말하는 일부터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프로그램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전하였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흠 없고 죄 없는 하나님께 대해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써 그의 고유한 신성을 나타내고 드러내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이적을 행하심으로써도 그와 같은 신성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단순히 그의 목숨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나라 백성들에게 의하여 버림받은 결과였다. 그것은 더욱 깊고 더욱 영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니라" (고후 5:21)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무덤에서 일어나셨고 자신을 어떤 선택된 증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 다음은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는 하늘에서 성령의 선물을 초대교회를 향하여 보내셨던 것이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새 생명과 새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삶은 완전하게 변하였다. 그들은 이제 생명다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이다. 복음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주어져 있다.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었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을 복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실로 여기서 자랑할 만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이나 어떤 변명하는 식의 겸연쩍은 얼굴 붉힘 없이 아덴에서 스토익학파들과 에비구레온학파들을 대면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메시지는 세상의 가장 높고 위대한 철학자들을 어린아이의 장난거리나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참된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인격 안에서 있다. 예화와 자신의 경험만을 설교하며 일색 하는 설교자들이 먼저 회복하고 다시 갖추어야 할 것이 복음이다.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삶과 그의 인격을 묵상한다면 설교자들에게는 설교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말라

당신은 유명한 저 윌리암 윌버퍼스와 그에게 찾아왔던 어느 부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부인은 윌버퍼스가 벌이던 노예 해방 운동 캠페인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에 그를 찾아와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윌버퍼스씨, 당신의 영혼에 관하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 그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인 난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의 잊었군요.' 그에 관한 그 부인의 말은 옳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말참견을 잘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그런 사람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그 부인은 '이 사람이야말로 선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닥쳐온 위험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문제에 대해 너무나 진력한 나머지 자기 영혼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일에 너무나 바쁜 나머지 자기 영혼을 잊고 그 영혼에 대해 게을리할 수가 있다. 당신은 모든 집회에 다 참석하여, 말할 수 있는 기력이 쇠할 때까지 반공을 선언한 후에 당신의 영혼이 어떤 자리에 처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변증학을 다 동원하고 당신의 모든 신학 지식을 다 동원하여 당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이 시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다 드러내어 말하고, 향후 50년 동안에 될 일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다 하자 그리고 성경의 모든 역본을 다 읽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전문적인 분야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자.

그 후 당신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당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떤가? 당신은 일 년 전보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릇된 것들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가? 당신의 성경 지식과 당신의 성경번역에 대한 지식이 아주 놀라운 증가를 가져왔고, 변증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하자.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법을 갈수록 더 복종하고 있는가? 당신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더 많이 나타나는가? 이 질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를 아느냐?' '그를 좋아하느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라 할지라고 그 자리를 빼앗아 버리면, 우리는 그릇된 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다른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가게 하는 수단과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그 방편들에만 만족한다면 그 방편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설교하는 것과 그 밖의 일에 밀려가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매너리즘에 빠져 안일함만을 좇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 기성의 체제에 같이 물들어 오류로 걸어갔던 길을 걸어가고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로이드 존스는 사역자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에 관해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선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어 모든 만물을 주관하신다.

일은 어쩌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건들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명확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처음부터 미리 질서 지워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에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때와 기한'을 다 아신다. 그는 이스라엘을 복되게 하실 때가 언제이며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실 때가 언제인지 아신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도 '때가 찼을 때'였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위대한 철학자들을 먼저 오게 하셨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제국이 일어나게 하셨고 모든 정권을 장악하고 질서가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 제국을 하여금 길을 닦고 전 세계에 놀라운 법적인 체계를 세워 확장시키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던 것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계획하셨던 것이다.

역사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20세기에 일어나는 일도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19세기 교회의 교만과 거만함을 잊지 말라. 그 교회는 자만에 처하여 있었고 소위 교양 있는 설교라고 하는 것과 학식 있는 목회라고 불리는 것을 즐겼던 교회였다. 그 부요를 자랑하며 자기 나름의 예배의식을 안위적으로 즐겼던 방식을 관찰하여 보라. 그 교회가 과학을 믿고 철학으로 계시를 대신하려고 하였던 자세를 주목하여 보라. 정말 교회는 징계를 필요로 하였다. 우리들이 19세기의 이야기를 숙고해 보면 이 20세기를 이해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이 모든 일에는 어떤 분변 있는 계획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상의하시기 위하여 멈추시지 않으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난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그 나름이 방식을 가지고 계시며 그에 따라 행하시고 일하시는 것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와 목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목표하는 것을 이루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는 목회는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있다. 언제나 먼저 내가 일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관하여 민감하여야 하는 것이 목회자가 가져야 할 우선되는 자질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진리 - 그것은 하나님만이 보여 주실 수 있는 비밀이다

성경은 사람이 과학적인 이론을 방편으로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려한다면 그는 계시에 복종해야 할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여, 인간은 도움 없이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확신을 버려야 하며 자기 자신의 이지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중단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계시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진리를 아는 어떤 지식을 가지려 한다면 그는 겸손해져서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심정으로 계시에 복종해야 한다.

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가장 위대한 진술들 중의 하나는 가시나무가 타는 불 앞에서 모세가 서있는 묘사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모세는 전형적인 과학적 태도로 그 이상한 현상을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그가 나아가서 그것을 관찰하여 조사하려고 했을 때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1-5) 당신은 여기서 조사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배해야 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같은 진리를 가르치셨다. 니고데모는 매우 유능하고 명망 있는 유대인의 선생이었다. 그는 와서 알아보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3,8)-마틴 로이드 존스

성경은 우리의 지식으로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불어 설교자가 지식으로 아는 만큼 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청중들에게 참 지식으로 이르게 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 중에 하나는 성경을 연구하지만 그 마음자세는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는 세태에 로이드 존스 목사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는 이제 성격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위대한 발언들 주의 하나에 이르게 된 것에 틀림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한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자는 누구든지 스스로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철저하게 부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 말씀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입장과 기독교 교훈이 진수 자체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바로 그것이 기독교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 말하는 메시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 모든 강조점은 마음에 주어져 있다. 우리 복되신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기록된 복음서의 기록들을 읽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내내 그가 마음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리새인 때문에 이 강조점을 둔 것이다. 그들은 향하여 지적하는 저주 거리였던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바로 그 문제로 그들을 향하여 도전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안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의 외적인 식양들에 대하여는 모든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등의 율법의 더 무거운 것은 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그것을 크게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마음이 그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중심이다. 그는 마음에 강조점을 두시고 계시지 머리에 강조점을 두고 계시지 아니하신다. 그는 이지적인 것을 권하지 아니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마음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들이 지적인 국면에서 지적인 승인만을 하고 어떤 몇 개의 전제들을 승인하는 것만으로 믿음을 생각하는 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물론 이지적인 면의 찬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공할 위험은 우리들이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는 것이다. - 마틴 로이드 존스

복음은 언제나 근본적인 것을 터치하여 치료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의 문제들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설교자의 능력과 권위는 그가 가지고 있는 백그라운드나 학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이해와 복음에 대한 100%의 순종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꾸만 형식화를 만들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하고 그만큼만 하려고 하나 주님은 그렇지 않고 마음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한 몇 가지를 함으로 신앙생활의 숙제를 다 한 것 같은 생각들을 우리는 가지나, 주님은 그것을 원하기보다 마음의 모든 것을 달라고 하신다. 설교자들은 성도들에게 형식화의 신앙을 갖게 하기보다는 마음과 생명을 다하여야 할 수 있는 대로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팔복 말씀의 처음 복음 세상에 의해 감탄받지 못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멸시를 받는 것이다. 세상적인 정신과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때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세상이 강요하는 것은 자기를 의뢰하고 든든히 믿고 서라는 것이다. 자기 확신, 자기표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세상이 문학을 보라. 만일 이 세상에서 출세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믿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세상이 하는 말이다 그 개념은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절대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현대적 개념들에 따른 세일즈맨 쉽은 무엇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는가? 그것은 확신과 확증에 넘치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같은 개념이 모든 영역에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고객을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직업에 성공하려면, 당신이 해야 할 큰 일은 당신이 성공하였다는 인상을 주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실제적으로 성공한 것보다 더 성공했다는 암시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저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확신, 자신감 바로 이것이 세상의 정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근본적인 믿음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의회 법안만으로 완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 구절에서 전적으로 그것과 대조되고 절대적으로 그것과 반대되는 무엇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챨스 웨슬레가 쓴 찬송 시를 기억할 것이다.

나의 불의함 뿐이오니

나는 비열함과 죄로 가득 찼네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그 찬송 시를 비웃어 조롱하며 말하기를 직업이나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그를 채용하려는 사람 앞에 가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우스울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완전하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러한 마음의 가난함을 가지지 않은 채 어떤 것을 느낀 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면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현대는 성공주의가 활개를 치고, 교회에까지도 성공이라는 괴물에 붙들려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면 우쭐되고 그렇지 못하면 왠지 기가 죽는 세대가 되었다. 성경에는 결코 성공이라는 의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였는가? 나 자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얼마나 큰 유익을 누리는가? 이러한 부분에서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기만 하면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주의에 물들어 버린 목회자와 성도들은 이러한 구절마저도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에 맞추어 해석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고후11:30-33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바울은 자신의 실패한 부끄러운 과거를 들춤으로 자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더불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낮아지는 것이다.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처음의 복이 이러한 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길을 멈추고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세상의 일이라는 폭군과 그리스도의 중심성

예수님은 이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를 무섭게 장악하고 사로잡는 힘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이 있느니라"(마6:24) 마음! 주님은 마음에 관해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니" '섬기다' 는 말을 주목하라.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를 장악하는 무서운 힘을 우리가 명심할 수 있도록 주님은 구체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무서운 힘을 우리가 명심할 수 있도록 주님은 구체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눈치챌 수 있다. -사람이라는 폭군! 세상이라는 폭군

우리는 다 이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면 주인 노릇을 하는 세상적인 것이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바로 장악해 버린다. 또한 그것은 강력할 뿐 아니라 교묘하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부요해질 때 그들의 삶 속에서 쉽게 일어나는 교묘한 변화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참으로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이지 못하면 그와 같은 변화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상주의가 보통 중년이나 노년에게는 호소력이 없는 데 반해 젊은 세대와 손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냉소적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땅의 보물들'의 희생물이 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주의하여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해 낼 것이다.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 보라. 많은 젊은 청소년들이 처음에는 밝은 비전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갈 때쯤 해서는 본질적으로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는다. 대학에 들어간 그 젊은이는 아직은 멋있는 젊은이다. 또한 정의감도 있고 현명하다. 그러나 처음 출발했을 당시의 그는 아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 감옥의 그림자가 자라나는 소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것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알고 있지 않는가? 감옥이 저만큼 있다. 우리가 눈치채고 경계하지 못하면 그 그림자는 재빨리 우리에게 다가선다.- 마틴 로이드 존스

세상적인 원리들과 그들의 포악한 힘!

무섭다. 이것 때문에 신앙의 변질이 일어나고 있다. 설교자들의 변질이 일어난다. 전도사 때 신학생일 때에 세상적인 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하건만 언제인지 모르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나는 저렇게 설교는 안 한다고 다짐을 하건만 역시 같은 강단에서 똑같은 설교를 하면서 서 있는 변질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도 이 폭군의 힘을 너무도 강하다. 왜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 중심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0 -21)

바울은 그의 전 생애에 있어서 변질이 오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언제나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잃지 않게 되면 주님의 뜻대로 충성하는 종들이 될 것이다.

그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았다

바울은 에베소서 2:13-16에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든 선한 행실, 그들의 모든 선한 삶, 그들의 모든 활동들, 그들의 모든 민족성, 그들의 모든 종교 등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전혀 쓸모없음을 인식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 안에 있는 연합으로 인도함을 받고 나온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 특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그들이 인도함을 받아 참여하게 된 연합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와'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된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을 믿지 않고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권속이 될 수 없고 그 연합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는 이어서 우리들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히브리서 10:19도 역시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들이 그러한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며, 그가 피 흘리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며 우리들의 죄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죄 삼으신" 것을 믿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고후 5:21)

사도는 에베소서 2장을 끝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연합에 계속 거하라고 하는 권면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의 결과 인하여 이제 같은 시민이 되었고 선지자들의 터 위에 함께"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초 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거민들 중에 거하는 분이시다.- 마틴 로이드 존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모든 것을 없애고 새롭게 만드는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만이 소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 나라가 하나가 되어 있지만 그것이 월드컵이라는 목표로 하나가 된 것이지만 이러한 목표가 사라지고 말 때 이 공동체성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동체성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루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세상에 덕을 끼치고 그들에게 기림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을 향한 헌신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지만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로 말미암아 나라의 일체성이 영원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분파와 성경적인 분리

교회가 분리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

교회 내의 잘못된 분열

1] 육적인 문제로 다투며 그것 때문에 분리되었고 당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고 있다.

2] 잘못된 지성주의로 인한 분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 등]

3] 거짓 영성으로 인하여 생겨난 분파[은사 운동]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들

1] 계시와 영감으로의 성경의 권위 고수

성경을 수락하는 말은 해서는 안되고 성경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표현을 써야 한다. 즉 구원에 관한 성경가르침뿐 아니라 성경 전체와 역사도 믿어야 한다.

2] 타락의 교리와 구원의 필요성의 강조

3]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 계획 [성경대로] -창3:15

4] 주님의 인격에 대한 진리이해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소유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이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다. 성화와 복 받을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속은 개인적 일뿐 아니라 우주적인 구속이기도 하며 죄의 모든 흔적들과 영향력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구별되기 위한 삶의 방식

1] 진리의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들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뒤섞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2] 깨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로서 우리의 모습

1] 형제애가 지적이해를 앞서야 한다.

어는 특별한 교리에 대하여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가 같은 성령에 의해 한 가족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내 형제입니다. 그의 지력이 저보다 못하다고 해서 해서 결코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2] 양심적인 이유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가진다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이해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약한 형제를 화나게 하는 원인으로 삼고자 하며 자신의 양심만 앞세우고 상대방의 양심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성경적이며, 비영적이고 비기독교적입니다

[에베소서 6장 강해 설교말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엡 6:1-24)

 

[에베소서 6장 강해 설교말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엡 6:1-24)

에베소서 6장 강해 설교말씀은 구원의 투구와 성경의 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되면 우리는 영적인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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