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구원과 선택과 예정에 관한 설교 중에서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의 확신을 얻어 최후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예지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죽어 봐야 구원받을 줄로 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확신을 얻어 믿음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은 완전히 구원받아 구원의 취소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구원의 취소되지 않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승리의 구원 확신(로마서 8:28-39)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삶의 과제에 있어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하는 결정은 우리가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것이 승리와 성공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서에 보시면 기드온의 삼백 명 군대와 맞서서 싸우던 미디안의 군대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군대의 숫자나 훈련 상황이나 병기들은 기드온의 군대를 수십 배, 수백 배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밤 미디안의 군인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진영으로 굴러들어 옵니다. 그러자 미디안의 군대 진영이 왕창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깬 후에 그 꿈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한 군사가 해석하기를 우리 진영에 굴러 들어온 보리떡 한 덩이는 아마도 기드온의 군대일 것이다. 우리 군대가 패배할 모양이라고 나팔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대한 미디안 군대 전체에는 순식간에 패배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해 버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확신을 가진 것이 마침내 승리를 가능케 한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역사에서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 당시에 가톨릭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인 교권만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모든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전체를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거대한 교권에 맞서서 싸웠던 한 사람 마틴 루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한 사람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와 더불어 짝을 이루어서 함께 동역했던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사에 등장하는 필립 멜랑크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틴 루터보다 약 15살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굉장한 친구였습니다. 얼마나 친했느냐 하면 두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유언에 따라서 부부지간도 아닌데 리틴벨크의 한 무덤 안에 묻혔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종의 행동주의자였다면 필립 멜랑크톤은 이론적인 학자였습니다. 루터는 종종 종교개혁을 하다가 실망했습니다. 좌절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어린 후배였지만 친구였던 멜랑크톤은 늘 루터 곁에서 말하기를 “당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진리라고 확신할 수가 있다면 그 진리는 반드시 이길 것을 믿어야 하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마다 말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멜랑크톤은 마틴 루터에게 성경의 한 구절을 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꼭 같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말씀이 있는데 그 구절이 바로 로마서 8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종교개혁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고 마침내 종교개혁은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확신을 본문에서 바울 사도에게서 발견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는 로마의 막강한 정치력이 그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신의 조그마한 거인인 믿음의 사람이었던 바울사도는 그 세계를 복음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승리가 반드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본문의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의 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확신은 저와 여러분의 확신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세계를 바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믿음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형성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승리의 확신의 근거를 본문에서는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로운 계획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불행이나 고통도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무효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8절과 그 전의 26절을 비교하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2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결정이 최선의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알지 못하고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며 우리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미지수의 상황들이 인생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렇게 많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가 삶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역경도, 불행도, 사고도,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고 말할 때 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냥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그 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다음 구절의 설명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29절).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던 선이란 바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경험하든, 그 모든 불행과 역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최고의 선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일이 마침내 완성된 상태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적으로 영화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정하시고 어느 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내가 그를 믿는 순간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고 주 앞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한 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모든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 나를 연단시키시고 빚어 만드시사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그를 닮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세워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 순간을 가리켜서 “영화”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바울은 이 사실을 “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느낀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만날 때 고통은 고통입니다. 솔직히 아무도 그 감정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픔은 아픔이요, 고통은 고통이며 슬픔은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기쁨일 수는 없지만 슬픔 그 자체가 영광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도 슬픔도 불행도 역경도 재앙도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것 이 내 인격의 연단을 통해서 나를 빚어 만들어 어느 날 주님 앞에 세워지는 그 순간,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존재로 나의 영화로운 인격을 그분은 완성하시고야 말 것을 나는 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그것도 먼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까운 형제들에 의해서 오해당하고 팔리움을 받고 죽음의 사지로 던짐을 받게 되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출하는가 했더니 먼 나라 이국 땅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하신 섭리는 마침내 요셉을 애굽땅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 나라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까지 세워 놓으시지 않으셨나요? 사랑하는 조국 땅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구걸을 하기 위해서 고향에서 자기의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자기를 죽음의 사지에 몰아넣었던 자기의 형제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곡식을 구걸하고 있는 장면은 요셉에게는 가장 적절한 보복의 기회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자리에서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근심하지 마소서. 나를 팔고 죽이려고 했던 당신들의 과거의 실패 때문에 나를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도울 수가 있고, 기근에 처한 내 민족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앞서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이 모든 상황을 섭리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원망이 없습니다.”라고 형제들을 당당히 용서하고 그 상황 속에서 넉넉한 승리자로 설 수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선물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실패를 경험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정한 필요를 그의 선물을 통해서 반드시 채워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하나님 자신의 최고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값진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옛날 부흥목사님들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어떤 아들이 다섯 있는 분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얘기하는 중에 그 친구가 아들 하나를 달라고 하자, 얼떨결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으니까 하나를 줄 테니 양자로 잘 키워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부인에게 혼나고 약속을 안 지킬 수가 없어서 잠자고 있는 다섯 아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들을 주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첫아들은 장남이라서 안 되겠고, 둘째 아들은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지혜로운 아들이라서 안 되겠고, 셋째 아들은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미남이고 자기를 쏙 빼서 닮았는지 모릅니다.
도저히 셋째 아들은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고, 넷째 아들을 보니 늘 병약하고 비실한 아들인데 그런 아들을 남에게 주는 것이 도저히 불쌍해서 안 되겠고, 다섯째 아들을 보니 막내를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는가라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이 구절에 나타난 논리를 가리켜 ‘보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외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자기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 다른 작은 것들은 왜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삶의 도상에서 역경과 고난의 폭풍우와 비바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동일하신 그분이 아들과 함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왜 아니 주시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워낙 물질주의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의 사고, 특별히 현대처럼 물질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사고가 물질지향적입니다. 본문의 성경구절에서 “모든 것”이라고 강조할 때 그 “모든 것”에 대한 바울 사도의 견해에는 하나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28절로 다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모든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본문의 32절에서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은 어떤 것일까요? 불행, 역경, 재앙, 오해, 억울한 사건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 앞에 사랑을 받은 자요,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빛나고 아름다운 그 인격을 본받게 하실 것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인격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아름다운 인격으로 영화롭게 그분 앞에 세워지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예비하시고 그 계획을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말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당당한 고백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성격은 영원함입니다. 한번 나를 사랑하시기 시작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이 현재의 삶의 순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그 아픔과 고통과 그 손해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비틀거리고 주님을 떠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버리는 나의 실패와 무지와 나의 영적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은 변치 않고 끝까지 완성될 것을 믿으십니까? 바로 이 영원한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 승리의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의 이 중요한 명제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있는 사건이 있을까요? 35절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저와 여러분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가상적으로 제시해 봅니다. 그는 먼저 외적인 환경적 요인들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등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38절에 보시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즉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어떤 사건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우리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의 공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지금 경험하고 있는 어떤 일도 미래에 경험하게 될 어떤 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건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인간에게는 저 높은 곳과 깊은 곳에 대한 공포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서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인생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위대하게 살아낸 한 한국인의 감동적인 얘기를 접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인 정연희 씨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맹의순이라는 한 신학교 출신의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6.25 사변의 피난길에서 그는 빨갱이로 오해를 받아서 체포를 당해서 포로수용소에 들어갑니다. 그는 유달리 이웃을 돕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난길에 빨갱이로 오인되어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그런 경우에 우리처럼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십니까?”라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에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전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모아서 광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광야교회가 세워지던 그날 그는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는 알았어요. 나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맹의순 선생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째서? 왜?라는 질문은 깨끗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수용소에는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맹의순 선생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갈 수가 없었던 중국, 그곳에 가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앞에 이 중국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 주셔서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날마다가 감격이고, 선교의 현장이며, 봉사의 현장이고, 복음전도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는 세월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맹의순 선생의 친구들이 그가 억울하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석방 탄원서에 자기의 이름만 서명하면 수용서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맹의순 선생은 그 서명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보내셨는데 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손 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고 찬송가를 가르쳐주고, 시편 23편을 읽어 주다가 그 자리에서 숨이 거둡니다. 수용소 밖의 교회에서 그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옵니다. 편지는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중공군 포로들 거의가 서명한 편지였습니다. 그 장례식장에서는 이 편지가 읽혔다고 합니다. 번역된 편지의 그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였던 맹의순 선생이 정말 가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군인 의사들을 도우며 우리의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여일 했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맹 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 가며 찬미가를 불러 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1시, 2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더욱 심하고 무서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 주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선생이 발을 씻어 주시면 천상에 오른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분의 손으로 씻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별로 불편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잘 사는 사람 몇몇이 우리들의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에 저들만 기름지게 살고 우리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모택동의 깃발 아래 모여 공산주의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나 구라파의 몇몇 나라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포로가 되었고 그렇게 되고 보니 쓰레기 같은 낡은 무기로 무장된 총받이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들은 무더기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붙잡혀 포로가 되고 팔 잘린 자, 다리 잘린 자, 눈 잃은 자, 살점 달아난 자, 동상으로 살이 문드러진 자가 되어 적군의 손에 의해 치료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될 대로되라는 심사와 끝없는 원망과 증오가 굳어져 우리의 마음은 깜깜하기 이를 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맹 선생이 오셨습니다. 맹 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껍데기를 녹여 주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의 손과 사랑으로 녹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의 모양이고 내 죄를 인해서 예수가 그 위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의 죄가 죽고 사랑이 살아남으로 승리했고 그 승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8월 11일 새벽에도 마지막 환자를 씻기고 난 선생은 자신의 눈물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을 봉독 하신 후 그분은 한번 더 힘차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시고 나서 먼 곳을 바라보시며 쓰러지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알았고 그리고 이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인 것을 알아서 사랑의 명령 앞에 순종했던 맹의순 선생의 마지막 고백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이 편지는 마지막에 이런 중공군들의 내용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 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넉넉한 승리가 아닌가요? 최악의 고통을 최선의 승리로 이끌어 낸 위대하고 넉넉한 승리의 고백이 아닌가요? 이 고백은 바울의 고백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도상에서 정말 내게 필요한 모든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들을 성실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바울과 한 가지로, 또한 맹의순 선생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에스겔 비유 설교말씀] 녹슨 가마 비유와 에스겔 아내 죽음(겔 2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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