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자 그는 자기의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보고 자기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음으로 복 받은 자입니다.
열두 제자 연구 : 의심하는 사람: 도마(요한복음 20:19-29)
1. 별명
1)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나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기 쉽다.
2) “의심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불려 왔다.
의심할 바 없이 도마의 별명은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잘못 이해하게 하는 요소도 있다. 눈에 뜨이는 그의 특징은 정직한 의심이다. 그는 진리를 알려고 질문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진리를 듣고 한 번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전심으로 그 진리를 따랐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화나는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요한복음에서는 도마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부활의 신비를 믿고 감동한 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몇 가지 증거 가운데 절정 단계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성실한 의심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3)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 잘하는 사람“이란 별명이 도마에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2. 제자 서열
도마는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제외하고는 새 복음서에서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1) 마태복음에서는 일곱 번째로(마 10:3)
2)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다 같이 여덟 번째로 기록되었다.(막 3:18/ 눅 6:15).
3) 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행 1:13)
4) 요한복음에는 3번 언급된다. 요한은 부활 후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들 가운데 그를 포함시켜 디두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요 11:16)
3. 성경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도마는 염세적이었지만 헌신적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아마 도마의 이중성격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인 디두모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며 ”쌍둥이“(디두모)란 별명이 어울리기도 한다,
1. 도마의 용감한 염세주의 (요한복음 11장 1-16절)
주님의 명성이 대단히 널리 퍼졌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폭도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나면서 제자들을 유대에서 요단으로 건너가는 곳인 비교적 안전한 베레아로 인도하셨다.
그곳에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을 기다린 후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보러 베다니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을 밝히셨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하나이까?”(요 11:8)고 여쭈었다.
제자들의 반대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요 11:1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죽음이 아닌 육체적인 휴식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가자고 하는 것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요 11:4), 너희들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요 11:14-15).
1. 유대로 돌아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의 거리를 좀 두고 바라보기만 하거나 마치 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제의했다. 도마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베다니로 갈 각오를 다짐했다. 우물쭈물하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집결시키는 용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지도자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였다. 그 용기는 그의 회의심을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땅으로 제자들이 발길을 재촉하였다.
2. 불완전한 도마의 용기
이 말만 본다면 그는 의리 있고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침울하고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도마는 사물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의사와 능력을 가지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용감하였으나 도마의 마음에는 이판사판 이래저래 죽을 것이라면 두렸기는 하지만 지금 죽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를 너무 꾸짖지 말자. 깊은 실의에 빠졌던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라고 기도했으며 다윗은 우리가 항상 쓰는 말씨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라고 울부짖었다(시 42:5)
2. 몹시 당황하여 질문하는 도마(요한복음 14장 1-7)
주님은 유월절 경배를 마치고 작별의 말씀을 하셨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제자들의 소망과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진리가 오리라는 제자들의 확신의 위험한 공포가 따랐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실로 새로운 시작임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배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축복이 내리는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셨다.
이때 당황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요 14:4)라고 말씀하시자 더 참을 수 없는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5)라고 여쭈었다. 주님의 사역이 죽음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도마는 이해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천국으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상에 왕국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의문을 도마는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의문은 믿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기보다는 착각이나 혼란 때문에 생긴 것 같다. 도마의 질문에는 정직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마는 여러 가지로 추리해 보는 제자들의 의문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믿음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마의 의문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도마에게 은혜를 입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표본이요, 선생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약 속에 있는 예언과 상징과 표적을 성취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모든 것이시다.
3. 도마의 정직한 의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날 밤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때에 그는 바위산 골짜기를 배회하거나 한적한 산을 오르면서 고독과 슬픔 속에 눈물짓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는 왜 참석하지 않았을까?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현대의 도마는 “하루 종일 힘들여 일했더니 너무나 고단해, 다락방까지 걸어가려면 내가 너무 지칠거야”라고 양해를 구할 것이다.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곳에 계시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마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에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조문을 하게, 그러나 그리스도는 안 계실 걸세”라고 말했다.
예화)
캐나다의 어느 도시에서 선거로 당선된 기독교인 시장은 당선된 직후 비서에게 “수요일 밤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은 하지 말게”라고 부탁했다. 이상하다는 듯 비서가 쳐다보니까 시장은 “수요일 밤에는 나의 주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네. 나는 주님과 만나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하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약속은 하지 않을 걸세”라고 설명했다. 그 도시의 시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빠지지 않고 수요일의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가 주님의 집에서 경배하지 않으면 많은 은혜를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도마는 여러 가지를 잃었다.
1) 도마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
텅 빈 무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때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닫아걸고 제자들은 그날의 당황스러웠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셨다.
이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그 가운데 자신도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18:20)
2) 도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그날 밤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어떻게 예언했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마음은 불이 붙고 밝아졌다. 그러나 도마는 구약의 예언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 예언을 배우지 못하고 말았다.
3) 도마는 믿는 자와 친할 기회를 잃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아직도 하나님이 갈고닦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로 자신을 갈고닦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에 머물러야 한다.
분명히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손들은 강건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한다. 왜 한 번도 빠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심 있어도 교회에 빠지지 말라. 성도의 모임에 있으면 성도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주님과 만나고 교제한다는 사실이다. 이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이론적 증명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한 순간의 체험이 눈 녹듯이 다 사라지게 만든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의심이 사라진다.
4) 도마는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었다.
예수께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고 이미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셨던 베드로를 제외하고 제자들이 죽은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다. 어찌 된 일인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서 계시지 않은가! 살아계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라고 축복해 주셨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은 채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가르침과 영감을 받는다.
5) 도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임받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다(눅 24:27-28/요 20:2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해 주셨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명을 부여받지 못했다.
6) 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
유령인 줄 알고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손,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에게 만져보고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못자국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설명할 때 못자국의 상처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도마는 제자들의 설명에 대하여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하였다(요 20:21-25)
도마는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와 열 제자들의 증거를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증적인 방법을 고집했다. 정직한 의심은 강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다.
7) 절망적인 의심에 잠겨있었지만 도마는 확신을 가지려 하였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한결같이 거듭되는 다짐은 다음 주일의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도록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다. 도마는 실망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눈은 도마를 찾으시더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6-27)고 부탁하셨다.
빌리그래함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라 할 때 나는 오늘 아침도 대화를 나누었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하면 이는 웃기는 일이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갈 6:4)
8) 도마는 오랫동안 추구하던 증거를 찾았다.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아무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이 열병 있는 이마를 만지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어린아이를 축복해 주는 것을 도마는 여러 차례 직접 본 일이 있다. 이제는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볼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말씀도 채 마치시기 전에 도마는 무릎을 굻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울며 고백하였다(요 20:28). 이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며 이전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의 어떤 형태의 확인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훌륭한 것이다. 도마의 음울한 의심은 빛나는 믿음으로 변하였다.
예수께서는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셨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증거를 찾는 믿음은 어느 편이 더 훌륭할까? 한 때 의심을 많이 하였던 도마는 의심을 풀면서 자기의 갈 길을 찾았다. 도마가 그 동료들 가운데서 믿음이 가장 확실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의심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안 믿겠다는 것은 어둠에 그대로 있겠다는 것이기에 불신앙의 죄이다. 정직한 의심과 불신앙은 다르다. 주님께서 도마를 제자로 삼으셨던 이유는 바로 의심 나면 물어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오늘의 우리들도 모르면 물어보자.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일수록 총명하여진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기를 바란다.
9) 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상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상기시며 준다. 상처는 금과 은처럼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표지가 될 것이다.(벧전 1:18-19)
예화// 부모가 없는 어린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 집에 불이 났다. 이 층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년을 구하려고 애쓰다가 할머니는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불타는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살려달라는 소년의 울부짖음이 불꽃을 가르면서 흘러나왔다. 집의 정면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한 사나이가 나와 이 층 창가에 닿을 수 있는 쇠파이프를 찾아 가지고 집의 뒤편으로 갔다. 몇 분간 그 사나이는 보이지 않더니 팔에 소년을 껴안고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 가운데 사나이는 소년을 목에 메고 뜨거운 파이프를 내려왔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이 소년을 보호해 줄 사람을 결정하려고 마을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모인 사람들은 짧은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하였다. 첫 번째 사람은 “나는 큰 농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오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는 교사입니다. 나에게는 큰 도서관이 있어요 소년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습니다”라고 자기가 소년을 맡는 데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발언을 했다. 이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이 소년에게 농장, 책, 교육, 그리고 돈이나 여행 등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소년이 함께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의장은 “또 말씀하실 분 없습니까?”라고 의견을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끌지 못하고 맨 뒷자리에 있던 낯선 사람이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얼굴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정면으로 나와서 그는 소년 앞에 똑바로 섰다. 낯선 이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꺼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마룻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사나이는 손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상처를 쳐다본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나이는 소년의 생명을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손은 뜨거운 쇠 파이프를 잡고 오르내릴 때 심한 상처를 입었다. 소년은 껑충 뛰어 낯선 사나이의 품에 안기며 그에게 자기의 생명을 의지하였다.
농부가 일어나고 교사도 갔다. 부자도 가고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소년의 생명을 구한 그 낯선 사나이만이 외로이 남긴 채 모두 가버렸다. 상처 입은 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연설을 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해관계는 우리의 헌신봉사와 싸움을 걸고 있다. 나이가 젊거나 늙거나 가릴 것이 없이 돈, 교육, 명성 환락의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의 손을 들어 올림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분이 수십 세기를 왕래하신 길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히브리어성경 열왕기하 강해]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왕하 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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