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신칭의에 대해서 말씀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행위를 주장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진노받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갈 3:6-14)
성 경: [갈3:6] 카도스 아브라암 에피스튜센 토 데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본절은 바울이 4:7까지 믿음과 율법을 번갈아가며 전개하고 있는 순차적(順次的)인 논증의 첫 번째 항목이다(Boice).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의로 정하셨다 -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로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롬 4:10).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디카이오쉬네)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1)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Boice).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 역시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다. (2)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E.D. Burton, Cole). 창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되었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의' 역시 신약 백성이 우리의 의와 같이 대속하신 구세주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先就)된 '의'일 뿐이다(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 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인정되었으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할례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갈3:7] 기노스케테 아라 호티 호이 에크 피스테오스 후토이 에이신 휘오이 아브라암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 바울이 할례 받지 아니한 믿음의 무리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이 '아들'(휘오스)이라고 한 것은 '아이'(테크논)라는 말과 의미상 차이가 크다. '아들'은 일차적으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자손들을 의미하지만,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가계(家系)와 상관없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마 12:27에서는 종파의 일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절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기 위함이다(Lenski). 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로서 아브라함에게 부여된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9절;롬 4:13;엡 3:6)
성 경: [갈3:8] 프로이두사 데 헤 그라페 호테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이 타 에드네 호 데오스 프로유엥겔리사토 토 아브라암 호티 엔율로게데손타이 엔 소이 판타 타 에드네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정하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롬 3:21).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워져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것이다(엡 1:11). 따라서 한번 작정된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거나 죄인의 반항에 의하여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사 46:10). 하나님의 포괄적인 작정은 아브라함의 구원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셨다.
성경이 미리 알고 - 보통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레게이'나 '에이페' 등이 사용되나 본절에서는 '알다'(프로이두사)라는 보다 의인화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인법(擬人法)은 22절의 '다두었느니라'는 단어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성경을 의인화시키는 것은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밀접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며, 또한 두 개의 주어, 곧 하나님과의 말씀이 동격에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을 전하되 - 아브라함에게 작정되고 전하여진 복음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주된 내용은 '너를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으리라'(창 18:18;22:18)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며 그것이 곧 복음의 내용임을 보여준다.
성 경: [갈3:9] 호스테 호이 에크 피스테오스 율로군타이 쉰 토 피스토 아브라암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일반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복'(베라카)은 말로써 부모가 자녀에게 빌어주는 것으로, '건강', '장수', '재산' 등 다분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지만(신 28:6), 본절에서의 '복'(율로기아)은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구원을 의미한다(벧전 3:9). '복'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방 민족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롬 4:24)
성 경: [갈3:10] 호소이 가르 엑스 에르곤 노무 에이신 휘포 카타란 에이신 게르랍타이 가르 에피카타라토스 파스 호스 우크 엠메네이 엔 파신 토이스 게그람메노이스 엔 토 비블리오 투 노무 투 포이에사이 아우타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저주 아래 있는 자라 -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 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7:24).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롬 4:15;5:16, 18).
성 경: [갈3:11] 호티 데 엔 노모 우데이스 디카이우타이 파라 토 데오 델론 호티 호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은 이제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한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필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할 것이다.
성 경: [갈3:12] 호 데 노모스 우크 에스틴 에크 피스테오스 알르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한다.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27:26).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딛 3:4,5).
성 경: [갈3:13] 크리스토스 휘마스 엑세고라센 에크 테스 카타라스 투 노무 게노메노스 휘페르 헤몬 카타라 게그랍타이 가르 에피카타라토스 파스 호 크레마메노스 에피 크쉴루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속량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사 53:6).
성 경: [갈3:14] 히나 에이스 타 에드네 헤 율로기아 투 아브라암 게네타이 엔 크리스토 이에수 히나 텐 에팡겔리안 투 프뉴마토스 라보멘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다(요 14:16-18;행 1:4).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눅 24:49).
[로마서 성경 읽기] 율법을 통해서 깨달은 죄(롬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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