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갈라디아서 헬라어 원어성경] 예수님과 죽고 살아난 성도의 구원(갈 2:17-21)

베들레헴 2023. 4. 1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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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헛된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예수님과 죽고 살아난 성도의 구원(갈 2:17-21)

 

성 경: [갈2:17] 에이 데 제툰테스 디카이오데나이 엔 크리스토 휴레데멘 카이 아우토이 하마르톨로이 아라 크리스토스 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 메 게노이토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써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8:39;14:7;2:1)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저급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 된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7:24)라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한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성 경: [갈2:18] 에이 가르 하 카텔뤼사 타우타 팔린 오이코도모 파라바텐 에마우톤 쉬니스테미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9:1-7) 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 '이단자'를 뜻하며 본절자서는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성 경: [갈2:19] 에고 가르 디아 노무 노모 아페다논 히나 데오 제소 크리스토 쉬네스타우로마이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 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페다논'은 다음 절에 나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라고 표현했는데(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성 경: [갈2:20] 조 데 우케티 에고 제 데 엔 에모이 크리스토스 호 데 뉜 제 엔 사르키 엔 피스테이 조 테 투 휘우 투 데우 투 아가페산토스 메 카이 파라돈토스 헤아우톤 휘페르 에무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8:18).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 대신에 '그리스도', (2) '율법' 대신에 '믿음', (3) 과거의 '옛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8:4).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성 경: [갈2:21] 우크 아데토 텐 카린 투 데우 에이 가르 디아 노무 디카이오쉬네 아라 크리스토스 도레안 아페다넨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은 '연고 없이', '이유나 목적이 없이', '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닌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욥기 히브리어 주석강해] 인생의 짧음과 헛됨에 대한 탄식(욥 9: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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