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예수님 성경공부] 예수님의 재림(데살로니가전서 3:13)

베들레헴 2022. 7. 1. 08:34
반응형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종말에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고 때가 되매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회개하면서 열심히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계속해서 자 범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 범죄를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항상 복음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십자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데살로니가전서 3:13)

 

살전 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재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서는 헬라어 파루시아와 일치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왔다. 그렇지만 신약에는 파루시아가 예수의 재림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2세기의 기독교 문학에서는 이 말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모두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ryr)는 Dialouge against Trypho 52장과 121장에서 첫째 파루시아와 둘째 파루시아를 구별한다. 신약에서 초림과 재림에 관하여 사용된 단어로는 에
피파네이아가 있는데 이것은 디모데후서 1:10에서 초림을 나타낸다. 초림에 대해서만 언급되는 단어로는 엘류시스(행7:5)와 에이소도스(행13:24)가 있다.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주의 임하심을 학수고대하기를 중요시하였다. 본 항목에서는 초림만을 취급하겠다.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출처는 제1복음서와 제3복음서에서의 그의 탄생과 유아기에 대한 이야기에 제한되어 있다. 전체 신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실에 대해 증언하지만 그러나 마태복음 1;18-2:23과 누가복음 1:5-2:39만이 그러한 사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던가를 말한다. 이러한 절들의 사실성(史實性)은 20세기 초반 후 주로 이 절들이 포함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들로 도전을 받아 왔다. 그 이유들이란 제2복음과 제4복음에는 동정녀에 의한 탄생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한 기록을 지지하기 위한 세속의 자료들로부터의 증거의 결핍, 그리고 그러한 탄생기사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눅2:1-5) 이었던 시기의 것으로 진술하는 것 등이었다. 그것은 복음서들이 어느 부분에서도 원래의 형태와 같지 않다는 것과 그것들은 설명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본문 비평과 문서 비평은 편집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변되어 왔다. 과학자들이 이적의 가능성을 제외하기를 전보다는 이제 더 주저한다. 누가는 복음을 기록하기 시작함에 있어 예수의 탄생을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비록 마태의 기록은 모른다 하더라도 누가의 것은 알고 있었을 요한은 마태나 누가의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 성육신에 대해 개괄적으로 언급한다(요1:14). 

신약의 어떠한 진술도, 그리스도의 탄생의 방법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과 불일치하는 것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면 그는 또한 독특한 방법으로 오셨다는 견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에 대한 반복되는 신약의 증언은, 동정녀에 의한 탄생 기사의 확실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잘 설명이 된다. 인구 조사에 대한 누가의 기록에 대해 수얼(Schuerer)와 그 외 학자들이 제기한 반론은 주로 위리암 람제이(Sir William M.Ramsay), 다이스만(Adoft Deissmann)과 그 외 저명한 학자들이 든 증거에 의해 충족되어 왔다. 하여간 1세기의 애굽에서는 매 14년마다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는 것과, 집에 없는 사람은 모두 등록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었다는 것이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헤롯은 오직 분봉왕이었을 뿐이며 아구스도가 분봉왕으로서의 헤롯의 통치 후반기에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충성에 대한 맹세를 획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왕국은 과세령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리라는 슈어러(Schuerer)의 반론은 신빙성이 없다. 비문의 증거는 수리아와 구레뇨의 경우에 있어 관직 재직의 두 기간을 시사한다. 이 기간 중 전반기는 헤롯 통치의 말년이나 B.C 4세기의 그의 죽음 바로 후년들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일 후자로 가정한다면 누가는, 헤롯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던 인구 조사가 구레뇨가 총독으로 있을 동안에 끝났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테일러(Vincent Taylor)는 누가복음의 난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히면서도, 누가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 실수를 하고 있다고 너무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에 대한 경로로써 루사니아(눅3:1)의 경우에 있어 누가의 정확성을 지적하여 용호한다. 전에 문제시되었던 누가복음의 많은 절들에 대하여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해 얻게 된 실질적인 지지가 본 문제점에 있어 빈센트(Vincent)의 신빙성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사의 내용은 그가 B.C.4세기 유대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비록 세상은 널리 그리고 유대인 세계조차 이러한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주목되지 않았거나 기대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 시대의 이삭과 삼손,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앞서 있었던 것과 같은 천사의 예고가 먼저 마리아에게와 그후 그녀와 약혼했던 요셉에게 그녀가 잉태하기 얼마간 앞서 있었다(눅1;26-28;마1:20,21). 이 두 복음에서 아이의 잉태에 대한 성령의 역사, 그 아이에게 주어질 이름과 그의 사명의 성경에 대해 언급되었지만, 그러나 비록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도 각각 사용된 말이 동일하지는 않다. 경건한 목자들이 베들레헴의 목장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합창 중 한 천사로부터 구주의 탄생에 대하여 들어서 알았다(눅2:8-20). 아기 구주의 탄생을 전후로 하는 시기는 예언가(豫言歌)의 회복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엘리사벳, 마리아, 사가랴와 시므온의 찬양은 성경에 대한 친숙함과, 그들이 속해 있던 가문의 특징을 이루는 독실한 경건을 나타낸다(눅1:42-45,46-55,68-79;2:29-33). 마태와 마가는 목자들과 안나 외에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당시 하나님을 경외했던 소수인들을 나타내는데 그들의 태도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과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눅2;25,38)과 같이 여러 가지로 묘사된다. 그들은 신앙 회복의 필요를 최대한으로 절감하였으며 그러한 회복이 충족될 예언의 성취를 열렬히 기도하며 기다렸다. 이러한 진지하며 경건한 열망에 대한 호감이 가는 증거들과는 대조적으로 두 복음은 성경의 공식적인 해석자들의 회의적인 무관심을 핏 암시하며, 헤롯왕의 사악한 적대 행위를 암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방 박사들에 의한 아기 예수 발견의 원인이 되는 미가 예언의 언급에 더하여서, 마태는 그리스도의 도래의 기간에 성취된 다른 여러 예언들을 지적한다(마1:23; 사 7:14; 마 2;15; 호 11:1; 마 2:17, 18; 렘 31:15; 마2 ;23, 이 절들에는 단 하나의 유사점도 없다). 그는 또한 아브라함과 다윗부터 예수의 혈통을 추적해 감으로써 초기 약속들의 성취를 간접적으로 지적한다(마1;1). 마태가 예수의 혈통을 기록한 형식과 누가가 기
록한 것는 각각 다르다. 주요 문제에 대해 가장 틀림없을 것 같은 해결은 마태가 법적이며 왕의 가계를 명시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데서 발견되는 것 같은데, 만일 그러한 가계가 계속 지지된다면 요셉과 그의 양자로서의 예수께서는 그러한 가계에 의해 왕좌를 주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결국,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속해 있던 평민의 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오셨던 세계 역사에 있어 그때를 가리켜 바울은 "때가 참"(갈4:4)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한편, 그때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졌던 때라는 것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 일반적인 세계 상황으로 인하여 바로 그때가 구주의 도래에 가장 적절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당시의 역사는 이것을 예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B.C.63년 이후 팔레스틴의 로마 제국에 포함되어 있던 광대한 영토의 일부였으며 그 제국은 강력한 유일 통치하에, 일찍이 알려진 세계를 연합했던 것보다 더 광대한 영토를 연합하였다. 예를 들어 분별 있는 군대 분포, 지역적인 지형에 따라 지방 정치의 방법을 신중하게 적용시킴, 로마를 가이사의 통치하는 가장 먼 지역들과 연결시키는 도로들, 백성들이 누리는 평화를 장기화하고 군사, 무역, 선생들의 활동을 촉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해적 행위가 일소된 바다 등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특이한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특별한 취급을 규정하여 그들에게 예외적인 양보를 하였다. 쥴리어스 시저가 그들의 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된 종교의 부류에 두었으며, 비록 이두매 탄생이긴 하였지만 종교상으로는 유대인이었던 헤롯을 분봉왕으로서 로마를 위해 유대를 통치하도록 임명하였다.


당시 팔레스틴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 중 극소수인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B.C.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에서 시작된 그들의 분산은 알렉산더 대왕과 안디옥 왕들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확산되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모든 대사업 중심지에 모여들었으며 여러 세대 중 열 명의 두령이 거주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회당(항목 참조)이 세워졌다. 여기서 그들은 성경 읽는 것을 듣도록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날에 모였으며 계속되는 하례 의식과 함께 이러한 관습은 그들의 독립된 주체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회당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헬라어는, 널리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헬라어를 말하는 모든 집단에서 공통된 형식을 취하였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로마 제국의 동부 전역과 부분적으로는 서부로 퍼져 나가 학문과 대학의 통용어는 물론 시장의 통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데서도 반영되었다. 더 나아가 아구스도의 통치에 앞서 있었던 수년간의 전쟁과 파괴는 많은 사회의 불안, 도의적인 무질서와 종교적인 파탄을 야기시켰다. 결국 헬라 철학이 옛 신앙을 침식해 들어가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자신들의 이전 거류지로부터 떠돌며, 소망적인 것이든 절망적인 것이든 새로운 단합을 의식한 많은 사람들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줄 어떤 신앙의 대상을 동경하여 찾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철학의 어떤 학파에 애착하여 도움을 구하였다. 다른 이들은 동양의 신비스러운 종교에 대한 열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수의 이방인들마저 회당에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단합적인 것과 하나님의 위엄, 인간에 대해 요구되는 도의적인 청렴과, 기대되는 구주에 대한 집중된 소망 등을 배우려 들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의 신성한 절기를 준수하고 절기를 순수하고 절기의 절정기에서 유대교를 좀더 친밀히 알기 위해 유대인들과 함께 갔다. 그러나 외적인 준수의 가상적인 가치에 사로잡혔던 세속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의 내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제사장과 바리새파는, 통찰력이 예리한 외국인의 눈에는 외양만의 경건으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게 하였고, 팔레스틴에서 영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백성에게 위로가 되기에는 너무나 졸렬한 자들이었다.(마21:13;23:15). 도의적인 타락이 만연하고 비관론과 영적 기아가 증가하며 인종의 벽들이 약화되고 유대인의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갈 때에 구주께서 보냄을 받으셨다. 주의 임하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거의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유대 민족의 영적 건강을 회복시켰으며 새로운 유형의 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것은 경건하게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명시된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에 대한 모든 증거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그것은 속죄에 대해 예비적인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용서와 그와의 화해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그것은 시종, 인간성이 자체의 한계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숙고할 능력을 입증하였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는 에스더] 왕후로 선택된 에스더(에 2:12-18)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는 에스더] 왕후로 선택된 에스더(에 2:12-18)

오늘의 성경말씀은 에스더 2장에서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더를 페르시아의 왕후로 선택하여 하만의 계략을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

bethlehem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