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3편 성경 주석 강해설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편 기자가 질투한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악인들이 더 형통하게 잘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죄를 짓는데도 세상에서는 육적으로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다 보면 하나님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질투함(시 73:1-13)
성 경: [시73:1]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본 시편부터 83편까지는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과 동(同)시대의 인물로서,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樂士)들의 수석(首席)이었다(대상 25:1).
하나님(히브리어 엘로힘)- 본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한다. 저자는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참으로'(히브리어 아크)는 본 문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Calvin). 저자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부정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부정한 자 곧 압살롬의 득세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불의한 자가 흥왕하고 의로운 자가 오히려 쇠망하는 현실의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신앙적 투쟁(13-16절) 끝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애매히 고난을 받은 동방의 의인 욥이 영적 갈등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발전된 새로운 시각을 소유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욥 42:5).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바는 인간의 외면적인 요소 곧 외모가 아니라 내면적 요소 곧 그 중심임을 암시한다(삼상 16:7;왕상 8:39;빌3:3). 사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께 패역한 행위를 일삼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고 교회에 출입하지만, 실제로 구원받을 자는 일부분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마 7:21;눅 13:22-30). 한편 '마음이 정결한 자'는 (1) 마음에서 죄의 추잡함과 불결함을 제해버린 자(Delitzsch), (2) 하나님께 대하여 외식적이지 아니하며 간사함이 없는(요1:47) 참된 예배자(Calvin)등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성 경: [시73:2]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 악인의 형통을 목격하고(3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한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적은 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도 신앙적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신앙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결국 저자는 배교(背敎)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성 경: [시73:3]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이는(히브리어 키) -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로서, 본절이 2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 여기서 '보고'(히브리어 에르에)의 기본형 히브리어 '라아'는 세심한 관찰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삼상 17:28;23:23;왕하 7:14;사 63:15). 따라서 본 문구는, 저자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처지를 동경하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의 '형통'(히브리어 솰롬)은 보통 '안녕' 혹은 '평강'의 뜻이지만,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까지도 포함된다. 본 문맥에서는, 건강의 축복(4절)과 물질의 축복(7절)을 주로 가리킨다.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질시하였음이로다'(히브리어 키네티)의 기본형 히브리어 '카나'는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의 뜻으로서, 소유물이나 세상적 가치들에 대해 파괴적일 만큼 강렬한 시샘을 가리킨다(창 30:1;37:11;잠 27:4). 또 '오만한 자'(히브리어 흘림)는 '높이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인 동사 히브리어 '할람'에서 파생된 명사형 분사이다. 따라서 '오만한 자'는 악인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스스로 지극히 교만해진 마음의 상태를 강조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본절의 '악인'은 처음부터 사악한 성품을 많이 갖고 있기는 했지만 부귀가 없었을 때는 교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많아지자 그 사악한 성품을 토양으로 하는 교만함의 싹이 트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지극히 높이려는 자가 된 것이다(6절). 이와는 달리 의로운 자는, 비록 부귀를 누리게 된다 해도, 자신을 높이려는 어리석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는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잠 1:7).
성 경: [시73:4]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여기서부터 12절까지에서는, 악인의 형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말해 준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로 번역함이 더 나으리라 본다(all through life their road is smooth, LB). 즉, 평생 동안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 문구에 대한 바로 이와 같은 해석은,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와도 내용상 잘 어울린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히브리어 하르추보트)은 '족쇄'(사 58:6), '결박'등의 뜻이며,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각양의 고난을 가리키는 듯하다. 물론 질병도 포함될 것이다.
그 힘이 건강하며 - 평생 동안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같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반드시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병이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아야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69:5).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재앙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까지 육체에 가시를 주셨고(고후 12:7), 그 가시를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후 12:9, 10).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 질병 등과 같은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축복의 하나이며,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은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시73:5]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본절은 악인의 형통을 좀 과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 악인들은, 보통 사람들이면 으레 겪게 되는 '고난'에서도 예외라는 말이다. 과연 모든 악인들이 다 이와 같이 전혀 '고난'을 당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시인은, 그토록 악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가시적인 어떤 징벌을 받지 않고 거만하게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이와 같이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난'(히브리어 아말)은 덧없고 무상한 세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가리킨다(90:10, Ronald B. Allen).
재앙(히브리어 예누가우) - 이것은 '만지다' 혹은 '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가'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런데 이 '나가'라는 동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107:18).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징벌적 성격을 띠는 여러 환난들에 대한 총괄적 용어임이 분명하다.
성 경: [시73:6]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악인들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악인들은 그 형통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패역을 행하는 것이다.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 이에 대해서는 (1) '목걸이'를 삶의 모양을 좌우하는 삶의 경향으로 보고, 악인들은 개가 목걸이에 의해서 질질 끌려다니듯이 교만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라는 해석(C.B. Moll, Hengstenberg), (2) '목걸이'를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물로 보고, 악인들은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특별한 인물인 듯이 행세한다는 뜻이라는 해석(Calvi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의 '옷'이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둘째,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목걸이'를 장식을 위한 수단으로 말하고 있다(잠 1:9;아 4:9)는 점 등에서,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 악인들이 '강포'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무한 탁월성을 과시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 문구의 해석을 참조하라. 한편, 로린슨(Rawlinson)은 본 문구를 사람들이 항상 옷을 입고 다니듯 악인들이 '강포'를 다반사로 행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가능한 해석이다(109:18, 19).
성 경: [시73:7]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 눈두덩이 불쑥 나와 보일 정도로 피둥피둥하게 살졌다는 의미이다(Their eyes swell out with fatness, RSV). 한편 70인역(LXX)과 시리아역은 '눈'을 '범죄'로 번역하여 본 구절을 '살짐으로부터 그들의 죄악이 나온다'(from fat comes forth their guilt)라고 해석하며, 또 어떤 학자는 '솟아나며'를 '빛나다'는 의미로 보고 '그들의 눈이 번영으로 인해 빛난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ahood).
성 경: [시73:8]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 여기서 '악하게'(히브리어 베라)는 '...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히브리어 '베'와 '타인을 해치려는 부도덕한 성품'(잠 15:3) 혹은 '난폭한 행위'(신 17:5;삼상 2:23;왕상 16:7;겔 20:44;30:12)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압제'(히브리어 오쉐크)는 '압박하다' 혹은 '폭력을 행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솨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권력이나 권위의 남용, 즉 낮은 위치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든지 혹은 억누르고 짓밟는 행위를 가리킨다(Ronald B. Allen). 따라서 본 문구는 극도로 악랄한 언어의 폭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모멸하는 것을 뜻한다.
거만히(히브리어 밈마롬) - '...로부터'의 뜻인 히브리어 '민'과 '높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롬'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높은 곳으로부터'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자신은 높은 사람인 듯 행세하고 상대는 비천한 존재로 얕잡아 보면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3:9]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 이에 대해서는 (1) 악인들이 하나님께도 거만한 말을 하였다고 보는 해석(Calvin, Deltzsch), (2) 악인들이 마치 하늘에라도 올라갔던 사람들이나 되는 양(사 14:13) 그래서 위대한 진리라도 소유하고 있는 듯이 거만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C.B Moll) 등이 있다. 그러나 10, 11절이 악인들을 추종하여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 매혹된 백성들에 관한 지적임을 고려할 때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저희 혀는 땅에 두르다니도다 - 앞의 문구가 거만한 마음으로 자기의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반면, 여기서는 악인들이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을 열심히 퍼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시73:10]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그러므로 - 본절이 9절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 이것은 '백성'이 악인들의 새로운 주의와 주장에 현혹되어 그들의 추종자가 된 것을 말해 준다. '백성'이 악인들의 주의와 주장을 따르게 된 것은, 그들의 형통(3절)을 부러워하였고, 또한 그 형통의 사실을 그들이 진리를 소유한 자임을 확증해 주는 증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히브리어 암)은 '대단히 큰 무리' 혹은 '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아삽의 시대에 수많은 백성들의 배교(背敎)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외적인 풍성 혹은 부흥을, 진리를 소유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진리를 가장한 비진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배교의 현상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 있을 것이다.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 악인들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악인들의 행동을 답습하는 것을 가리킨다(욥 15:16). 새로운 추종자들은, 악인들이 내세우는 모든 것들을 마치 참된 생명수라도 되는 양 모두 마시었다. 즉, 그들의 악행을 답습한 것이다.
성 경: [시73:11]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하나님이 어찌 알랴 -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되 하나님을 인간 역사와는 무관한 존재로 생각한다. 물론 그 추종자들이 원래부터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신정 국가의 백성들인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그 지식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배교자들은, 악인들을 좇아 악행을 저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악행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 '지극히 높은 자'(히브리어 엘룐)는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 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97:9;창 14:19;신 32:8;단 7:18). 그러나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본 명칭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지 아니하시는 분 곧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말하는 데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님의 명칭을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3:12]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항상 평안하고 - 악인들이 불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고 아무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재물은 더 하도다 - 7절 주석 참조.
성 경: [시73:13]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 저자가 경건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악인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 자신이 곧 경건한 삶을 살았는데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하는 한탄이다. 악인은 불의한 삶을 사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이 형통한 반면, 저자 자신은 경건한 삶을 사는데도 현실적인 부귀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14절) 이같이 극심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손을 씻는다는 것은 죄악 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욥 9:30).
[마태복음 히브리어 성경말씀] 살인과 간음과 이혼에 관한 법(마 5: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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