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낼 편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언한 말씀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종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천국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반드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9-20)
•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것은 요한의 겸손을 잘 나타낸 말이다.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은 언제나 겸손한 자들이었다. 모세도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다고 하였다(민12:3). “형제요”라는 말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말이다. 우리는 다 형제요 하나님만 높고 위대하신 분이다.
예수의 환난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환난이다. 예수님을 위하지 않는다면 환난도 없고 평안할 터인데 예수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환난을 받는다. 성도가 진리를 양보하면 환난을 받지 않겠으나 진리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환난을 받게 된다. 예수를 형편 따라 되는대로 믿으면 환난을 받지 않겠지만 성경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환난이 따라온다.
주님을 가까이하여 적극적으로 말씀을 따라가면 환난이 오게 되어 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에는 예수님을 더욱 찾게 되고 더욱 가까이하여 예수님을 좀더 발견하고 예수님께 좀 더 참여하고 예수님을 좀 더 얻게 된다(시119:67, 71). 육신적으로는 고난을 당하지만 영적으로는 은혜가 풍성하게 된다.
예수의 환난에 참여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의 환난에 참여하려면 참음(인내)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예수님이 당하신 만큼의 고난이 온다. 그때에 예수님과 같은 인내를 가지고 참고 견디어야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생활이며 예수님과 영적 교통이 이루어져서 예수님으로 즐거워하고 예수님으로 사는 생활이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갈라놓을 수가 없다. 예수 믿는 성도가 법적으로는 하늘나라를 얻어 놓았으나 실지로 자기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못하고, 영적 생명의 역사가 없고,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서 능력의 역사가 없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누가복음 18:8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자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고기 잡는 비유(마13:47-50)에서 그물에 고기가 가득히 차 있었던 것처럼 교회에 교인들은 가득 하나 하나님과 교통 하면서 말씀의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아가는 산 믿음을 가진 자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대부분이 육의 사람으로 예수를 믿고 인간적인 사교와 사랑을 기대하며 종교 사업과 인간의 친목적인 활동에 만족하면서 자기를 위해 주기를 바라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은 산 믿음이 아니다.
•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을 들으니
주의 날은 안식일(토요일)이 아니고 그 다음 날인 주일(일요일)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이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 음성이다. 다른 사람은 함께 있으면서도 잘 듣지 못한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여 밧모섬까지 귀양살이를 갈지라도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사도 요한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크게 임하여 나팔 소리와 같이 들리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심령이 둔해져서 감동을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감동은 있으나 너무나 약하고 힘이 없다.
나팔 소리만큼 크게 감동이 되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이 약하여진 것은 그만큼 생명의 역사가 약하여진 것이고, 감동이 끊어진 것은 신앙이 벌써 죽은 증거이다. 성령의 감동이 점점 커져야 희망이 있는 사람이고, 영이 자라나는 사람이다. 성도는 누구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면 감동을 크게 받을 수 있다 또 성령의 감동을 귀하게 여겨서 성령께 순종하고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소아시아 지방에는 당시에 본문의 일곱 교회 외에도 여러 교회가 있었다. 본문의 일곱 교회만 예수님이 대표해서 택하신 것은 신약시대의 교회 전체가 이 일곱 교회의 형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의 모든 교회들은 이 일곱 교회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몸을 돌이켜 이것은 회개하였다는 말이고 세상으로 향하였던 것을 온전히 주께로 돌이켰다는 말이다. 온전히 돌이킬 때에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세상을 향하여 나가고, 사업주의로 나가고, 우상을 찾아 나가고, 자기를 위하여 나가던 자리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다.
돌이키지 않으면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없다. 믿는 성도들도 현실 세상 중심으로 살고, 육신 중심으로 살며, 명예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령한 세계는 거기에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서 온전히 돌이켜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 사도 요한이 돌이킬 때에 금 촛대를 보았다. 금 촛대로 되어 있는 이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가 아니고 영적 교회를 가리킨다. 영적 교회는 세계 공동의 유일한 교회(ἐκκλησία:에클레시아)이다. 이 교회는 지금 건설 도중에 있으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상 천하에 하나로 되어 있다.
영적 교회는 금 촛대와 같이 아름답다. 예수님이 피 흘려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생명이 넘치고 금 촛대와 같이 아름답고 보배로운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귀한 보배요 영원불멸의 존귀한 것이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붙들고 금 촛대를 건설하여 나가는 중에 있는 것이다.
영적 교회는 인간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섞은 것이 없이 순수한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서 이루어져 나가다가 영원히 하늘 나라에까지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 영적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터 위에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다. 금 촛대(교회)는 점점 만들어져 성장하여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으로 만들어 가신다.
성령의 감동과 중생한 영혼을 써서 일심정력을 다 기울여 말씀과 영감을 순종할 때에 조금씩 금 촛대가 이루어져 나간다. 영적 교회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으로 예수 믿는 것과 육으로 예수 믿는 것과는 다르다. 육으로 예수 믿으면 영적 교회를 이루어 나가지 못하고 영으로 예수를 믿어야 영적 교회가 이루어져 나아가게 된다. 육으로 믿는 신자는 중생한 영혼이 자라나지 못하여 항상 어린아이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신자들이 되지 못하고 육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3:1-3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교회로 자라나지 못하였고 따라서 젖이나 먹는 교회이었다. 육에 속한 신자는 믿기는 믿으나 영이 자라나지 못하여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고린도 교회와 같이 육에 속한 교회가 많다. 육의 사람으로 예수를 믿고 육의 사람끼리 모여서 친목하고 육의 사람을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기쁘게 하여 준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고, 교역자도 강단에서 육에 속한 신자가 좋아하는 말씀으로만 가르친다. 모두가 육에 속해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말씀을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는 교인은 많이 모였으나 신령한 면으로는 조금도 커진 것이 아니다. 금 촛대가 아니고 육의 교회만 커진 것이다. 즉 무화과나무에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과 같아서 교인만 많았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적 열매는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하신 것도 영에 속한 순금 등대를 이루어 나가는 신앙을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성도가 영에 속한 보배로운 교회를 발견하면 너무 아름답고 보배로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생명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존귀한 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교회에 손해를 많이 준다. 또 신령한 교회를 육의 교회로 끌고 가는 탈선행위가 나오게 된다. 참된 영적 교회를 발견하고 또 이루어 나가려면 성도가 먼저 영에 서야 한다. 영적 세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교통 하여 영적 감동을 받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며 말씀으로 날마다 영적 교회가 건설되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 나아갈 때 영적인 힘이 길러지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주어지는 시험, 국가적으로 주어지는 시험,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서 영적인 힘과 지혜와 지식을 길러 나아가야 한다. 교회에 시대적으로 오는 시험이 있는데, 항상 말씀을 붙들고 그 시험을 이겨야 순금 촛대가 만들어진다.
감동에는 외부적 감동과 내부적 감동이 있다. 외부적인 감동이란 육신에 속한 감정적인 감동이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육의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감동은 설교를 듣는 그 순간은 감동(육의 감동)이 되어도 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령이 영혼 속 깊은 가운데 역사하여 영적 감동이 일어나야 한다.
힘을 내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영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있고 외부적인 것을 받아서 나오는 힘이 있다. 교역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강도(講道)할 때는 영이 영에게 말하여 감동을 크게 받는다. 이러한 감동이 참된 감동이다. 영적 감동과 육의 감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나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반드시 미혹 받을 날이 온다. 감동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육의 감정에 끌리기 쉽고 그릇된 신비주의에 미혹되기 쉽다.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영적 감동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교회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힘이 들고 어려우므로 육신이 좋아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교회가 많다. 참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고 성령께서도 참 교회를 세우시려고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 현대 교회들이 영적 역사는 중단되고 세속화되어 인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응해지는 것 같다.
순금 촛대가 이루어져 나아가는 교회가 되려면 말씀 가운데서도 좀 더 단단하고 요긴한 말씀을 받아 영으로 그 말씀을 깨닫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힘을 써서 영이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라난 것은 조금 자라났어도 금보다 귀한 보배이고 하늘나라에서 영원, 무궁하도록 남아 있는 촛대가 되어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도가 순금 촛대로 만들어졌으면 그 인격이 보배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육의 감동과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은 풀이나 나무나 짚으로 만든 것이 되어 주님 재림하실 때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만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만 주의 재림 때에 상급이 있다. 영혼이 하나님말씀과 영적 감동으로 자라난 것은 금 촛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어도 거기에 인간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안 된다. 곧 성경대로 하여도 자기를 위하는 것이나 억지로 하는 것은 금 촛대가 만들어지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아니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은 순수한 것이다. 자기를 위하는 정신이 온전히 빠져나가고 하나님만 위하는 정신과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해나가야 바로 된 것이다. 또 그 일을 할 때에 인간의 힘과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하여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 한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자기의 신앙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은 둘째로 하고 교회를 크게 하겠다는 데에만 마음을 다 쏟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바로 되기를 힘쓰고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순종하여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교인을 보내 주시는 대로 충성을 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양보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섞어서 교회를 인도하면 외부적으로는 큰 교회가 만들어질지 모르나 순금 촛대는 만들어지지 못한다. 순금 촛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인본주의요, 인본주의로 만들어진 것은 다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고 영이 날마다 자라나며 하나님의 뜻에 피동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영적 교회가 커진 것만 온전한 것이다.
순금 촛대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주 어렵고 까다롭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진리(하나님 말씀)를 조금만 양보하면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터인데 그 진리를 세워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멸시를 받기도 하고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위로해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순금 촛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 1:13-14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같은 이”라고 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부활하기 전의 예수님과 같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신령한 몸으로 교회에 항상 같이 하여 주시며,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다(마28:20)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옷을 상징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속죄 제사를 드려 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가슴에 금띠 예수님의 왕권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잡으신 만유의 왕이시다. 또한 “금”은 믿음을 상징하는데,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단장하였다는 뜻도 있다(엡6:14; 벧전1-7 참조).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이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성결을 가리킨다(사1:1참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여 완전한 성결을 이루신 것이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주님은 모든 것을 통찰하신다(요1:4,: 4:18 참조). 사람의 마음, 심령 골수까지 다 통찰하시며 과거와 현재의 모든 숨은 죄를 다 살펴보시고 계신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같이 다 드러나서 숨길수가 없는 것이다(히4:13).
•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걸어가신 발걸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여 단련한 주석과 같이 빛나는 발걸음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둘째는 단련한 주석과 같은 견고한 발로써 대적들을 밟고 죄인들을 심판하신다는 뜻이 있다(사63:1-6).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위엄과 권위를 잘 나타내 준다. 예수님이 한마디 말씀하시면 천하에 있는 것을 일시에 다 망하게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것이다.
•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별”은 교회의 사자를 가리키는데 예수님의 오른손에 교회의 사자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교회의 사자를 붙들고 쓰신다는 뜻이다. 교회의 사자는 주님이 친히 붙들고 쓰시며 교회의 사자가 잘못 나가면 주님이 내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오른손에 붙들고 쓰시다가 나중에는 버리셨다. 사울 왕이 버림받은 것은 ① 자기를 위하고 ② 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자기를 위하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으므로 내버리신다. 교회의 사자가 종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복종하면 하나님께서 오른손에 붙잡고 귀하게 사용하시며,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 특별히 보호해 주신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날 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므로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용납함으로 주님이 날선 검을 가지고 찾아가셨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여 끊어 버려야 하는데 버가모 교회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 이러한 버가모 교회 사자에게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라고 책망하셨다. 진리에 굳게 서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하여야 한다.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인 결점이나 실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말씀에 위반된 것은 용납하면 안 된다. 말씀에 위반된 것을 용납하면 마지막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날 선 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말씀이 아닌 것은 칼로 베는 것처럼 잘라 떼어 나아가야 주님이 아주 기뻐하신다. 가령 음식에 먹지 못할 것이 섞여 있는데 어린아이가 분별없이 그냥 먹으려고 한다면 그 부모가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는가? 그러나 그 집의 종이 먹지 못할 것을 제거한다면 주인이 아주 기뻐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섭섭해할까 봐 그대로 놓아두면 주인이 그 종을 옳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진리인가 비진리인가” “인본주의인가 신본주의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인간으로부터 온 것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사람을 위한 것인가”를 분별하여 갈라놓아야 한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예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같이 된 것이다.
•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사도 요한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볼 때 죄와 허물로 너무 한심하기 때문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과거에는 괜찮은 줄 알았으나 영광이 충만하고 불꽃같은 눈앞에 자기 정체가 드러나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심판하실 것을 깨달았을 때에 주님 앞에서 기절을 하여 거꾸러진 것이다. 사도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예수님을 다시 발견할 때에 그 앞에서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어려움에 동참한 사람이며 믿음을 지키다가 밧모섬에 정배(定配) 가지 않았는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던 제자인데 예수님의 빛에 자기가 드러날 때 거꾸러져 죽은 상태가 되었다. 거꾸러진 요한을 예수님이 오른손을 얹고 붙들어 주시며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하여 주셨다.
처음이요 나중이니 너의 구원의 시작이 예수님이요, 나중까지 너의 구원을 이루어 줄자도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요한이 자신의 참모습을 볼 때 비참하고 한심한 상태임을 깨달아 예수님 앞에 거꾸러졌으나, 요한의 구원을 예수님께서 책임지고 이루어 나갈 것이라고 위로해 주신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요한을 붙들어주셨고, 지금도 붙들어 주시며 나중에도 붙들고 쓸 것이니 두려워말고 일어나도록 주님께서 자비로운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항상 살아 계시고 성도들을 산 생명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자에게는 산 생명을 계속 주시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다 정복하여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사망과 음부의 세력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로 보여 주신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를 가리킨다(12:16절). 하나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를 이루어 나가시는 일이 중요하므로 그 일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성도가 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나가면 원수를 다 이기고 순금 촛대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순금 촛대를 이루어 나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을 순종한 것만큼 금 촛대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높은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여 점점 크고 아름다운 금 촛대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성령은 진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진리가 초보적인 말씀뿐이면 아무리 성령의 역사가 강하다고 하여도 그 이상의 높은 영적 성전은 건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적 성전을 건축하여 나아가는 데는 점점 높은 진리를 받고 그 진리에 도달하려고 힘을 써서 도달하여야만 아름답고 견고한 영적 성전이 건설되어 가는 것이다. 순종하기 어렵고 도달하기 힘든 말씀도 순종하려고 힘을 쓰고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면 하나님께서 만능으로 역사하여 마침내 순종할 힘이 나오고 도달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자기의 인격을 만들어 갈 때 과거에 없던 것이 많이 생기게 되고 보지 못하던 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미지의 세계를 점점 개척해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곧 영적 진보이다.
이제 있는 일 일곱 교회의 형편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해 주신 모든 사실을 가리킨다.
장차 될 일은 미래의 예언적인 구원과 심판이다. 요한 자신뿐만 아니라 만대에 모든 사람들이 이 계시를 통하여 영적 성전을 잘 이루어 나아가도록 사도 요한에게 이 계시를 주시고 또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별의 비밀 별은 교회의 사자(使者), 곧 교역자를 가리키는데, 사자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과(엡1:9) 그리스도이다(엡3:3-4 ; 골2:2). 하나님의 종을 비밀이라고 한 것은 교역자를 통해서 천국 비밀의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여 주시고 그 일을 하신다(암3:7). 비밀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종 된 선지자에게 먼저 알려주시고 그 선지자를 통하여 그 비밀을 가르치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만들어진 대로 교회가 되어 나간다. 교역자가 잘 만들어지지 못하면 교회가 잘 되지 않고 교역자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갔다면 교인들도 신령한 세계에 들어간다. 교역자가 타협주의로 나가면 교회가 타협주의로 나가고 교역자가 일심 정력을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하면 교회도 일심정력을 기울인다. 교역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을 두려워하면 교인들도 하나님과 말씀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이장(二章)과 삼장(三章)을 보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직접 책망하거나 칭찬하지 않으시고 교회의 사자를 책망하거나 칭찬하시었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역자이다 교역자가 만들어진 것만큼 교회가 만들어진다. 먼저 교역자가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장성하여 그것을 교인들에게 먹여주면 교인들도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자라난다. 교역자가 불의를 제거하고 의를 세워나가면 교인들도 불의를 제거하고 의를 세워나가려고 힘을 쓴다. 교역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여 부르짖고 힘을 쓰면 교인들도 교역자를 닮아간다. 교역자가 나태하여지고 세상 주의로 나가면 교인들도 나태하여 세상주의로 나간다. 교역자를 보면 그 교회의 정도를 대강 알 수 있다. 교역자는 참으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일반 성도들도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밝히 깨달아 자기가 지금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똑바로 알고 나아가야 한다. 말씀에 비추어 믿음으로 “현재”를 통과하면 현재가 구원을 이루는데 이용될 것이고, 말씀대로 “현재”를 살지 못하면 현재가 장차 올 심판의 원인이 될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당하고 같은 현실을 당하였지만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현재를 통과하면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께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예수님 말씀] 시므온의 예언 찬송과 안나의 예언(눅 2: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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