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에서는 인간이 부패되어 타락하자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했다. 홍수로 심판하여 인간들을 쓸어 버리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은 노아를 발견했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살면서 노아처럼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눈에 발견된 자가 되어야 한다.
당대에 완전한 자 노아(창 6:6-10)
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전혀 무관심한 방관자처럼 보신 것이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 자처럼 보셨다. 반항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식들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보는 친절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보신 것이다. 이는 그를 진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슬프게 하여,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나타난 표현은 매우 특이하다.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그토록 고상한 능력과 재능을 지닌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를 위해 안락하고 편안한 거처가 되도록 지으시고 꾸미신 땅 위에 그를 두셨는데, 그렇게 한 것을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적 표현법을 따라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불변하는 영광과 축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 이 말은 하나님에게 어떤 감정이나 근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신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다). 죄와 죄인들에 대해,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반역하는 죄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노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죄로 압박을 받으며(암 2:13), 괴로움을 당하고(사 43:24) 근심케 되며 상하며(겔 6:9), 본문에서처럼 한탄하신다. 이것은 인간이 친절을 베풀었던 자들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고 모욕을 당할 때에 그 베푼 친절을 후회하고, 다시는 면전에서 야유하고 마음을 쏘는 능구렁이를 품속에 품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겠노라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죄를 미워하시는데 우리가 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케 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죄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고 찔림을 받지 않을 것인가? 이 같은 생각을 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그토록 근심케 하고 슬프게 했던 바로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슥 12:10).
2. 이 말은 하나님의 심경의 어떤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욥 23:13) 그는 “변함도 없으시다”(약 1:17). 그러나 이 말은 그의 길의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시고 나서 “쉬어 평안하였으니”(출 31:17),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 자신의 솜씨를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 배신하고 말았으니, 진노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변한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구원하신 일을 한탄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비록 이것이 보다 더 큰 희생을 치른 역사이기는 했지만). 이는 구속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별하고 효험 있는 은혜를 지금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롬 11:29).
Ⅱ. 죄악으로 인해 인간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7절).
1.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셨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이같이 죄를 극복하고 멸하여 다시는 잘못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죄를 유감스럽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뉘우친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죄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의 길(행실)의 변화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의 변화는 헛된 것이다.
2. 하나님은 사람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말씀의 원어는 지극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땅에서 사람을 쓸어 버리겠노라”라고 한다. 이는 마땅히 깨끗해야 할 곳에 있는 쓰레기나 오물을 쓸어 그 합당한 곳인 오물 처리장에 던져 버린다는 것과도 같다(왕하 21:13 참조). 자기가 사는 곳에 흠이 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쓸려 없어지게 된다. (또 어떤 이는) “내가 땅에서 사람을 지워 버리겠다”라고 했다. 이는 저자에게 불쾌한 글귀를 그 책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혹은 사람이 죽거나 또는 그 공민권을 박탈당할 때 그 이름이 자유인의 명부에서 지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다.
3. “나의 창조한 사람”이라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하실 것을 작정하시면서까지도 당신께서 친히 지으신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를 창조하였지만, 이 사실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느니라”(사 27:11). “그를 지으신 이가 그를” 구원하지 않으리라 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이는 우리의 통치자가 아닐 경우에는 우리를 멸망시키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또는 “내가 그를 창조했는데도 그 창조주에 대해서 불효막심하고 배은망덕하니, 내가 그를 멸하겠노라” 하는 말씀이다. 자기들의 생존의 목적에 합당치 아니한 자는 그 생명을 잃게 된다.
4. 짐승들까지도 이 멸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고 하셨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위해 지음 받았으므로 사람과 함께 멸망당해야만 했다.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는 말씀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또 이들을 창조한 목적이 역시 좌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음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들로 자기의 육욕을 충족시키는 데 썼고 부질없는 것으로 삼았으니 멸망된 것이다.
5.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신 것이 헛되이 되자 이와 같은 결심을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멸망당하지는 않는다.
노아의 행적(창 6:8-10)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독특한 영광의 징표를 지니고 있는 노아를 엿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노여워하셨을 때에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속에 정의가 있으며, 또한 세상이 모두 타락했노라고 선언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던 모든 사람의 성품을 각각 엄격하게 시험해 보셨음을 보여 준다. 한 선한 사람이 있으매 그를 찾아내시고 그에게 미소를 던지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때에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시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 은총은 특별히 강력한 은혜로서 오는 것이다. 아마도 노아는 그의 생활과 가르침을 통해서 “세상을 정죄했기”(히 11:7)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고 핍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이것은 족한 영예요 위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보다도 노아를 훨씬 더 중히 여기셨고, 이 때문에 그는 당시에 유명했던 용사들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고 참으로 영광스럽게 되었다. 은혜를 입는 것을 우리의 야망의 정점으로 삼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께서 용납하시는 자들이 되도록 힘쓰자(고후 5:9).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자는 크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Ⅱ. 세상 모든 자들이 악해졌을 때(이것이 노아에 관해 알아야 할 기사다)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다. “노아는 의인이요”(9절)라고 했다.
1.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내려준 이유. 그의 신앙심은 하나님의 자비심을 독차지하기에 합당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자들은 노아와 같은 인간이어야 하며, 그가 행한 것과 같이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2. 아니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 안에서 선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그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 이제 그의 성품을 살펴보자.
(1) 노아는 “의인이었다.” 즉 그는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의의 후사가 된” 사람이었다(히 11:7). 올바른 도의와 성품이 그 안에 뿌리박고 있었다. 또한 그는 교제에 있어서도 의로웠다. 모든 자들을 공정하게 다루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로 돌려주는 양심의 소유자였다. 참으로 정직한 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제는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좌우되어야 한다(고후 1:12).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지만 결코 부정한 것들을 택하지는 않으셨다.
(2) 그는 “완전한 자”였다. 이는 죄 없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실성에 있어 완전했다는 뜻이다. 은총의 계약, 즉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우리의 성실성이 우리의 복음적 완전함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3) 그보다 앞서 에녹이 그랬듯이,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감찰 아래 있는 자답게 하나님과 더불어 행동했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 하는 생활을 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성실히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들을 은혜로운 눈으로 내려다보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4) 그러나 보다 더 그의 성격을 영예롭게 하는 사실은, 운명으로 타고난 그 타락하고 퇴폐한 자기의 세대에서 그 같은 성품을 가졌고 그같이 행동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신앙이 유행하고 있을 때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려 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조류를 거슬러 상류를 향해 나아가는 강한 믿음과 결의의 증거다. 노아가 이같이 행동했으니, 영원히 기록되어 불후의 영예가 되리라.
[시편 히브리어 성경말씀] 공의로운 판단을 위한 기도문(시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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