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설교말씀] 제 3의 복 온유한 자(마 5: 5)

베들레헴 2022. 9. 2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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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복 온유한 자(마 5: 5)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도덕적 윤리의 독창성은, 어떤 새로운 교훈을 말하는 데 있다기보다, 현재의 교훈을 중심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 교훈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전달해 주신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도 온유한 자들에 대해 복을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들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다. 세상의 이상은 전반적으로 주님의 이상과 아주 다르다. 세상의 이상은보다 눈에 잘 띄는 이른바 영웅적인 미덕 쪽으로 기울어진다. “자신의 소유물을 지킬 수 있는 강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세상은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기자도 역시 주님처럼 이 진리를 말한 적이 있으며 그 말씀에 글자 그대로 똑같은 약속(땅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부여한 바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는 다윗의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첫째로 이 그리스도교적 온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다음, 둘째로 그 온유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셋째로 그 온유가 어디로 귀결되는가를 살펴보자.

 

I. 기독교적 온유는 무엇인가?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들에 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성향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유의 기독교적 개념에는 이러한 면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측면이 있는데,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 즉 마음의 성품과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온유의 신앙적 측면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심이 어떤 양상을 띠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제아무리 아프게 찢고 제아무리 외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불평 없이, 뿌루퉁함 없이, 거역 없이, 반항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이를 참고 수용하며 이에 복종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복 되다고 선언하신 가장 깊은 온유의 개념이다. 슬픔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가 천부적인 초자연적 힘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까다로운 아이가 매 맞을 때 길길이 날뛰듯, 발로 차고 쥐어뜯고 소리 지르듯이 그 슬픔을 모욕과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본문의 이 축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우리의 슬픔을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 그 축복을 획득해야 한다. 그리 할 때 그 슬픔은 엄숙한 기쁨 아니면 그와 아주 유사한 어떤 것으로 승화될 것이다. 몰이 막대기를 뒷발로 차는 소는 오직 두 가지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몰이 막대기를 제거하지도 못할뿐더러 복사뼈에 상처까지 입게 되며, 짓무른 상처 속에 날카로운 끝이 더 깊이 박히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이 칼을 휘두르시도록 허락하라. 주님은 칼을 휘둘러 상처를 깨끗이 도려 내신다. 주님의 칼에는 독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참고 수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 온유는 의심 없이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온유의 좌소는 의지이다. 의지를 굽힐 때 사람은 완전을 향해 진일보하게 된다.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주시고 빛과 어둠을 주시며 때로는 손을 내미시고 때로는 손을 거두어들이시며 때로는 권위 있는 목소리로 명하시고 때로는 달콤한 사랑의 끈으로 잡아끄시는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행위 속에는, 우리의 의지를 한 조각의 가죽처럼 유연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온갖 손길에 순응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진정한 온유는 인간을 향한 마음의 태도보다 훨씬 더 깊은 면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우리의 최고 선으로 굳게 붙잡으며 하나님의 그 뜻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순응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 결과로 인간을 향한 진정한 온유가 나타난다(우리는 보통 이 인간적 온유를 온유의 전부인양 착각한다). 진정으로 온유한 마음은 온갖 자극적 상황에서도 성을 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짖음에 똑같이 짖음으로 응대하는 개와 같다. 그렇게 짖어 보아야 밤은 더욱 무서워질 뿐이며 자기 목만 쉴 뿐이다.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해를 당하면 당할수록, 악의와 조롱에 싸이면 싸일수록 더욱 끈기 있고 끈질기게 사랑해야 한다. 성도들이여! 이를 말하기는 쉬우나 행동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명명백백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온유하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끄떡없이 자신을 제어하고 평온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을 것이며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온유는 남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푸념을 터뜨리고 아우성을 친다.

 

남이 떠받들어 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 요구하면 할수록 얻는 것은 더욱 적을 것이다.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멀리할수록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을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빈약하고 천박한 토대 밖에 되지 못한다. 진정한 권면은 이것이다.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엡 5 : 1). 만일 산상수훈은 나의 목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의 온갖 삶에서 마찰과 불화가 얼마나 많이 제거되겠는가! 그야말로 전체 사회에 일대 혁신이 일고 지상은 낙원이 되지 않겠는가! 온유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이 미덕은, 우리 주님의 실례가 보여주듯이 불요 불굴의 용기 및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과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부드러움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오직 모든 것을 정복하는 온유의 옷을 입어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II.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온유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온유의 복은 영의 가난애통을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애통해하는 자에게 약속된 위로를 뒤따르고 있다. 앞의 두 가지 복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자아 성찰적인 것이었으나 온유의 복은 하나님과 남을 향한 행동과 성향이다. 그리고 온유의 복은 바로 앞의 두 가지 내적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 성냄, 보복, 반역 등의 불꽃에 냉수를 끼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앞의 체험들을 통과하고 우리 자신을 정당하고도 겸손하게 평가하며 통회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발아래 엎드리고, 그의 은혜로운 손에 붙들려 티끌 가운데서 일어나 그의 품에 안기는 데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을 파악하고 통회하며 용서와 정화를 받은 자, 오직 그 만이 온갖 자극과 여하 한 환경 속에서도 온유한 심령으로 살 수 있다.

 

우리가 나 자신의 죄악을 찾아내었다면 그리고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내 마음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라는 의식이 가득 찼다면, 확실히 그는, 자기를 성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연단에 대해, 발을 구르며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내게 임한 그 슬픔 속에서, 그리고 온갖 손실과 실망 속에서, 또 내 삶과 가슴의 온갖 공허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대한 약속을 성취하시는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너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내가 너를 깨끗케 하리라.’ 이와 같이 슬픔이 주어지는 연단의 가장 고상한 목적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정화의 도구를 너무 많이 주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만을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통회하는 심령에 주시는 위로를 실제로 받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든 쉽게 기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헤아려 보고,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가를 발견해 낸다면 형제의 멱살을 붙잡고 내게 진 빚을 갚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가 만일 내게 부당하게 대하고 내게 해를 끼치며 나를 비웃거나 냉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화를 내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라고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성을 보다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행히도 천부적으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지극히 심오한 동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바르고 참된 동기에서 이 미덕을 배양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동기를 보다 강화시키려면, 세 번째 온유의 복이 8복의 꽃 사슬에서 어느 위치를 점유하는지 고려해 보아야 하며, ‘영의 가난애통이 온유에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재는 예리한 시금석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알고, 통회 중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온유해질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온유하지 못하다면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노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테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삶의 항구적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는 한 가지 커다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III. 이러한 온유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시편에서 인용된 말씀이다. 시편 기자의 그 말은 약속의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점령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구약시대에 가나안 점령은 이스라엘의 충성에 좌우되는 사안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왕 자신의 점령 계획표인 이 산상수훈을 살펴볼 때, 이와 같은 말씀은, 육적인 유대인들의 뜨거운 메시아 대망 사상에 분명히, 한 양동이의 찬물을 끼얹는 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한 왕이 계셨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군단에 대한 무장 폭동으로 땅을 수복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유하라 그러면 진정으로 땅을 소유할 것이다.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에 빌라도가 있든 없든 그건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8복에 부속된 모든 약속이 그러하듯이 이중적 관련성을 가진다. 이 약속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엉성하고 허술한 해석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 불충분하게 입증되는 이 약속의 확실성이, 미래의 완성에 대한 어떤 희미한 소망에 의해 보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참 제자가 됨으로써 받는 이 선물들은 현세와 내세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물론 내세에는 상황이 변하며 우리가 지상에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많은 요소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행복의 본질은 이 세상의 것이든 , 희미하게 빛나는 저 멀리 영원의 것이든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이중적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임시변통적 해석이 아니라 본질적인 실제 사실이다.

 

그림자가 햇빛을 따라다니듯, 확실히 현세에도 온유에는 땅의 상속이 뒤따른다. 물론 문자적 의미에서의 상속은 아니다. 이 기독교적 미덕에, 모종의 물질적 이득을 끌어당기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소유에 있어서는 세상은 강한 사람, 유능한 사람, 힘과 박력과 야망이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땅의 평수로 정할 수는 없다. 지극히 풍요로운 외적 조건, 탐욕의 꿈을 한껏 충족시킨 부요, 염려의 아픔을 초월한 재물은, 어떤 사람에게든 세상이 알고 있는 어떤 초라한 행복조차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업으로 받는다(상속한다)”는 의미를 캐기 위해 더욱 깊숙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진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 고요하고 평온한 수용과 그 뜻에 대한 순종, 그리고 남을 향한 이 부드러운 사랑의 자세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는 하나님이 우리를 물질적 빈곤 중에 처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가장 차원 높은 유익을 얻는다.

 

항간에, 귀신들과 죽은 영들은 물질적인 제사 음식을 통해 먹을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향연 속에 을라가는 어떤 미묘한 향기와 정()으로 자양분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아가며 이를 통해 번영을 누린다. 비록 세상의 소유물은 매우 적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지상적 이득을 진정한 차원에서 소유하므로 행복하다. ‘많은 악인들의 부요보다 의로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 더 낫다.’ 자기 죄를 인식하고 애통해하며 온유하게 사는 자들, 그리스도의 용서와 정화의 위로를 유일한 소망으로 마음에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자들. 온유하게 수용하고 온유하게 참으며 온유하게 순종하는 자들은, 현세에도 광야를 장미꽃이 피어나는 기쁨의 동산으로 만들 것이고, 고요한 평화의 샘을 얻을 것이며 내세에서 면류판을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온유가 이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모든 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21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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