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산상수훈 설교말씀] 가시나무와 엉겅퀴(마 7:16-20)

베들레헴 2022. 9. 21. 17:35
반응형

가시나무와 엉겅퀴(마 7:16-20)

 

마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오늘 주신 말씀은 산상보훈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내용의 <양과 이리>의 비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두 비유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좋은 교훈을 말씀하신 후에 그 말씀을 잘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조금 소재를 달리하여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말씀한 거짓 선지자들을 알아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알 수 있을까요? 얼굴은 다 같이 양의 모습입니. 거짓 선지자일수록 더 잘 위장을 한다고 했습니다. 가슴에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가르치십니다.

 

1. 먼저 그 종자와 뿌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출발점이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리면 마지막에 가서 보면, 거짓 선지자는 다른 결과,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뿌리도 다르고, 종자는 물론 다르고, 열매도 다릅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줄기와 잎입니다. 뿌리와 열매를 연결해 주는 잠깐 동안 자라는 줄기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논에 볍씨를 뿌리면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피가 자랍니다. 종류가 완전히 다른 식물이지만 열매를 맺기까지는 줄기가 벼와 비슷해서 구분하기가 힘든 것과 마찬가집니. 오히려 벼보다도 더 힘차게 잘 자라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피가 무성한 것을 보고, 농사가 잘 되었다고 좋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지도자의 가르침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너무 서둘러서 판단하고, 비판하려고 하지를 말고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 본색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은 참지를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하나님을 만난 듯이 쫓아가다가 망하고, 또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므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지금도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을 빌어서 수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이단 종파들이 처음에는 정통적인 교회보다도 더 화려하고, 더 열심 있고, 더 많이 기도하며, 성경 연구에 힘을 써서 이상하기는 해도 잘 구분이 안되어 혼란을 일으킵니. 이런 때에 우리의 태도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지고 잘 비교하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이것은 옳다. 이것이 진짜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에게 불만이 많이 있었고, 우리 교회의 잘못된 일들 때문에 답답했었는데 잘되었구나. 하고 뛰어들었다가 망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우리와 조금 신앙의 방법이 다르다고 <너희는 이단이다>라고 성급하게 정죄를 했다가 사실이 그렇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혼란을 겪고, 자기 스스로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에 가면 지금도 <감리교는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장로교가 있다고 합니다. 감리교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하는 말이니까 안 믿을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마디로 기다리지 못해서 빚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느냐? 열매가 나타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열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말은 번지르합니다. 과장하고 과대 선전하게 마련입니. 그렇기 때문에 그 말만 가지고, 판단하다가는 그르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말은 잎이요, 줄기이기 때문에 줄기가 무성하다고 피가 무성한 논을 바라 보면서 <농사는 대풍이겠다>고 즐거워하면 놀고 지내는 사람은 가을에 가서 낭패를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잎이 무성하면 열매를 맺을 날도 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교회든지, 어떤 단체든지, 어떤 개인이든지, 목회자든지 평신도든지 불구하고,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면 가만히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기다려 보세. 그들이 한 많은 말들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맺을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아서는 분명하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 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판단해 보시지요. 제일 먼저 우리는 말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사상, 느낌, 감정이 말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이 표현되어 나오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불만이 밖으로 드러나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순한 말,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마음은 착하고, 선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거짓 교훈이 들어가면 거짓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7절 이하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 마음속에 심긴 것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심긴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많은 부분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부모와 가정의 영향은 자녀들에게 절대적이고, 그것이 그대로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한 씨를 뿌렸는데 아직 열매가 없습니까?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갈 6:9절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씨를 열심히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나의 마음 밭에 뿌려야 합니다. 말씀을 열심이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고 나의 가정에 뿌려야 합니다. 부모와 남편들에게 신앙을 열심히 심으십시오. 자녀들에게 심어야 합니다. 조급히 열매를 바라지 말고 좋은 씨를 많이 심어야 합니.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이 열매가 되어 돌아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종자와 뿌리의 문제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나쁜 종자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서 아무리 예쁜 싹이 나고, 양지바른 곳에서 거름을 많이 해서 잘 자란다 하더라도 결국은 나쁜 열매를 더 많이 맺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 나무가 환경을 좋게 한다고 해서 나쁜 열매를 좋은 열매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환경을 탓하거나 방법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종자의 문제입니다.

 

현대 과학문명과 현대의 심리학이나, 교육학이 실증주의를 중요시하며, 실험을 통한 이론에 치우치다 보니까, 환경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어쩌면 사람들이 환경의 노예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 의미조차도 환경의 변화와 지배에 맡겨 버리고, 잘못하면 환경을 탓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환경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 환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뛰어 허물어 버리고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종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11:17)

 

에베소서 2:5절 말씀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에 이르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부딪혀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기쁨과 평화가 마음을 적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나는 체험이 아니고서는 어떤 교훈이나, 수양을 가지고는 절대로 달라질 수 없습니다. 조금 나아지고, 변화를 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변화, 종자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이것은 나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하나님께로서 온 생명이 있어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열매가 얼마나 있습니까?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내가 몇 가지나 맺고 있습니까?

결론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씨앗이 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질 때,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중생의 능력이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성화의 원동력이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 말씀은 나를 지배하게 되고, 그 말씀은 나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도 알지 못하는 순간 더럽고 추한 행위는 사라지게 되고, 주의 은혜와, 주의 주시는 풍성한 삶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위는 말씀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이 교훈을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세요. 그렇게 되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맺힐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당연한 말씀을 자주 목사님들이 하는 이유는 좋나무와 같은 사람들이 귀하다는 것이겠지요. 좋은 나무가 되기보다는 좋은 열매만을 구하고,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에 관심을 가지 않고 좋은 결과와 좋은 대우 만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나무입니까? 가시덤불 같은 나무는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을 찌르고, 상처를 주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그런 나무는 아닙니까? 엉겅퀴 같아서 전혀 쓸모가 없는, 누구도 돌아보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나무는 아닙니까?

 

우리가 좋은 나무만 된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은 저절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잡풀이나, 가시나, 엉겅퀴, 논에 난 피처럼 무성해 보이는 나무와 풀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무시하며, 자신을 뽐낸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묵묵히 우리 속에 자라는 생명을 키우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에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기도하면서 우리 속에 생명을 북돋아 주고, 찬송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봉사하면서 잘 돌보아 주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아름다운 열매를 따기 위하여 우리를 맞으러 오실 것이고, 우리를 위하여 잔치 자리를 마련하여 영접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더 히브리어 성경말씀] 빅단과 데레스의 역모를 막은 모르드개(에 2:19-23)

 

[에스더 히브리어 성경말씀] 빅단과 데레스의 역모를 막은 모르드개(에 2:19-23)

빅단과 데레스의 역모를 막은 모르드개(에 2:19-23)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고 하는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의 암살 음모를 알고 에스더에게 알린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bethlehem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