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이 본 네 바퀴 이상(겔 1:15-28)
15절바에레 하하요트 비힌네 오판 에하드 바아레츠 에첼 하하요트 리아리바아트 파나이브
=====1:15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 '바퀴'란 네 생물들이 활동할 때 신속하고 수월하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 또는 그 네 새물의 일부분인 것으로 보인다(20절;10:9, 12). 혹자는 이 '바퀴'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받치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단(platform)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Carley, Dyer). 또 다른 사람은 이를 세상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Calvin).
16절 마르에 하오파님 우마아세헴 키엔 타리쉬쉬 우데무트 에하드 리아르바이탄 우마르에헴 우마아세헴 카아세르 이흐예 하오판 베토크 하오판
=====1:16
넷이 한결같은데 -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일치와 상호 조화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황옥(타르쉬쉬) - 이란 출 28:20;39:13에서 '녹보석'으로 번역되었으나 일반적으로 푸르거나 녹색이라기보다는 황금빛 색깔을 띤 보석의 일종으로 본다(Carley, Plumtre, Wycliffe). 그리고 단 10:6에서는 주님의 몸을 묘사하는 색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주님의 고귀함, 신성의 영광스러움을 암시한다. 본 구절에서도 이 바퀴가 그 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나타낸다 하겠다.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 일반적으로 이는 바퀴 안에 또 다른 바퀴가 직각으로 교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Taylor). 이러한 바퀴 구조는 (1) 하나님의 섭리의 다양성, (2) 세상사와 하나님의 섭리 간의 긴밀한 연관성, (3) 수종 드는 자의 철저한 순종 등을 상징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17절 알 아르바아트 리비에헨 비레키탐 옐레쿠 로 이사부 비레키탄
=====1:17
행할 때에는...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 바퀴가 각 생물의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15절) 사방으로 있으나 행할 때는 한 방향으로, 돌이킴이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는 뜻이다(9, 12절 참조).
18절 비가베헨 비고바흐 라헴 비이르아 라헴 비가보탐 밀레오트 에나임 사비브 리아리바이탄
=====1:18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 이는 슥 3:9;4:10;계 4:6의 말씀과 유사한 표현으로서 바퀴의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일)을 감찰하되 온전히 빠짐없이 통찰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천지를 감찰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전지성(全知性)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대하 16:9;시 139:1-12).
19절 우빌레케트 하하요트 옐리쿠 하오파님 에칠람 우비히나세 하하요트 메알 하아레츠 이나세우 하오파님
=====1:19
생물이 행할 때에...바퀴도 들려서 - 생물들과 바퀴들이 일치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수행하며 그 뜻을 좇음을 뜻한다.
20절 알 아세르 이흐예 샴 하루아흐 랄레케트 옐레쿠 샤마 하루아흐 랄레케트 비하오파님 이나시우 리임마탐 키 루아흐 하하야 바오파님
=====1:20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 '생물의 신'이란 12절에 언급된 '신', 즉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며, 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생물들의 생명과 힘의 근원, 그리고 주관자가 되심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성도들이 '생명'되시는(요 14:6)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명의 성령'으로 거듭나고(요 3:6) 그 '생명의 성령'에 의해 살아감을 엿보게 한다(롬 8:2;갈 5:25).
21절 빌레키탐 옐레쿠 우비아미담 야아모두 우비히나시암 메알 하아레츠 이나시우 하오파님 리이맘탐 키 루아흐 하하야 바오파님
=====1:21
저들이 행하면...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 이는 19, 20절의 반복이다. 이 같은 반복은 생물과 바퀴가 상호 연관되어 그 신의 지배를 받고 그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본 단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새로운 단락으로 전환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22절 우데무트 알 로세 하하야 라키아 키엔 하케라흐 하노라 나투이 알 로세헴 밀마일라
=====1:22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 '수정'의 히브리어 '코라흐'의 원래 의미는 '얼음'이다(욥 6:16;37:10). 따라서 '수정 같은 궁창'이란 얼음처럼 맑고 막힘이 없는 듯한 투명한 궁창을 뜻한다. 그리고 '궁창'이란 창 1:6-8에서 쓰인 말과 같다. 이로 볼 때 선지자가 본 것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맑고 투명한 창공과 같은 곳이었으며, 곧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26절). 이는 죄와 부정을 티끌만치도 용납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순결성을 엿보게 한다.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 이는 궁창이 맑고 투명하며 어떤 흠이나 부정들을 배격하는 온전한 상태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의미이다.
23절 비타하트 하라키아 카니페헴 이샤로트 이샤 엘 아호타흐 리이쉬 쉬타임 미카소트 라헨나 우리이쉬 쉬타임 미카소트 라헨나 에트 기비요테헴
=====1:23
그 궁창 밑에...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 궁창 위에 계시는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 앞에서 그 영광을 보좌하는 생물(그룹)들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모습은 지성소 내의 그룹들이 그 날개를 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속죄소 위를 감싸 덮고 있는 모습을 상기시킨다(출 25:18-20).
24절 비에쉬마 에트 콜 카니페헴 케콜 마임 라빔 카콜 샤다이 빌레키탐 콜 하밀라 키콜 마하네 비아미담 티라페나 카니페헨
=====1:24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 이는 네 생물들의 날개 소리가 미세하거나 연약하지 않고 장엄하며 웅장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43:2;시 29:3, 4;계 1:15).
전능자의 음성 -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을 우뢰 소리로 비유한다(욥 37:4, 5; 40:9; 시 18:13; 29:3; 104:7).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 활동하던 날개를 접어두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거하는 자세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다음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멈추고 대기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25절 바예히 콜 메알 라라키아 알 로샴 비아미담 티라페나 카니페헨
=====1:25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 궁창 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발하여짐을 뜻한다(26절).
26절 우미마알 라라키아 아세르 알 라샴 키마르에 아벤 사피르 데무트 키세 비알 데무트 하키세 데무트 키마르에 아담 알라이브 밀마일라
=====1:26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 '보좌'란 하나님이 좌정하시어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16)로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주권적 통치자 이심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의와 공의를 그 기초로 삼고(시 89:14;97:2) 영광으로 충만해 있다(사 6:1-3).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 '남보석'(에벤 사피르)이란 일반적으로 푸른빛과 자주 빛의 중간의 빛을 띠는 보석으로서 대제사장의 흉패 둘째 줄에 박혀있는 것이기도 하다(출 28:10;39:11). 여기서는 하나님 보좌가 신성한 것임을 암시한다(출 24:10 참조).
사람의 모양 같더라 - 이는 인간 형상의 근원이 되시는(창 1:27) 하나님을 엿보게 한다.
27절 바에레 키엔 하쉬말 카마르에 에쉬 베이트 라흐 사비브 미마르에 마티나이브 우리마일라 우미마르에 마테나이브 우리마타 라이티 카마르에 에쉬 비노가흐 로 사비브
=====1:27
내가 본즉...광채가 나며 - 특히 본절의 '불 같고', '불 같아서'란 표현은 심판주로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암시한다.
28절 키마르에 하케세트 아세르 이흐예 베아난 베욤 하게셈 켄 마르에 하노가흐 사비브 후 마르에 데무트 키보드 아도나이 바에르에 베에폴 알 파나이 바에쉬마 콜 미다베르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무지개 같으니 - 색색이 어우러져 비추는 영롱한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하고 아름다움을 뜻한다. 한편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언약의 증표로서 노아에게 나타났고(창 9:12-14),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보좌 주위에 영롱하게 둘려지기도 한다(계 4:3).
여호와의 영광 - '영광'(카보드)이란 원래 '무거움', '풍부함'이란 뜻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경우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의 외적 표현 혹은 그러한 속성을 나타낸다.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 위엄 있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경배의 태도를 뜻한다(창 17:3, 17;24:52;출 34:8;수 5:14;대하 7:3).
[마태복음 산상수훈 설교말씀] 가시나무와 엉겅퀴(마 7: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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