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히브리어성경

[요한복음 히브리어 주일 설교문] 예수님 성전 정화 사건(요 2:12-25)

베들레헴 2022. 6. 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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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유월절이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이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돈을 버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돈 버는 장소로 만들면 안 됩니다. 복음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으면 세상 종말에 심판받을 때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교회도 복음 말씀으로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성전 정화 사건(요 2:12-25)

 

• 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가버나움은 갈릴리 유대의 수도로서 예수님의 집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의 집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셨는데(마4:13 참조),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 않으시고 곧 전도하기 위하여 떠나셨다.  가족들은 그대로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형제들 예수님의 동생들이 네 명이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사촌(從兄弟) 동생이라고 하나 잘못된 주장이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예수님의 친동생이 분명하다(마 13:55, 막 6:3).

•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에는 유대인이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가장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상경하셨다.

•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두 번 성전을 정결케 하셨는데 요한은 그 첫 번의 것을 기록하였고 공관복음에는 그 두 번째 것을 기록하였다(마 21:12-l3, 막 11:15-18, 눅 19:45-46 참조).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 왜 성전 안에 고와 양과 비둘기를 쏟고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는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려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아무것이나 바치면 안 되고 날 때부터 거룩하게 구별하여 기른 것을 바쳐야 된다고 가르치고 날 때부터 구별하여 기른 것들을 가져다가 성전에서 파는데 시장보다 비싼 값으로 팔았다.  또 당시 통용되던 화폐(데나리온)는 로마 황제 가이사 화상이 그려져 있으므로 그 돈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 기뻐하지 않고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세겔)으로 바꾸어서 연보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세겔을 바꿀 때에 환전 요금을 받아 그 돈을 나누어 가졌다.

의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는 것 같이 했지만 그이면(裏面)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의식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서(사 29:13 참조), 이익을 보려는 탐욕이 가득했다.  성경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자기가 기르는 것 가운데 흠 없는 것을 바치라고 하였으며 시장에서 사다가 드려도 된다고 하였다(신 14:24-26 참조).  소나 양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칠 때에도 막대기를 놓고 소나 양을 한 마리씩 넘어가게 하여 열 번째 넘어가는 것을 바치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안 된다고 하였다(레 27:32-33 참조).  그런데 성전에서 소와 양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는 일을 한 것은 유대 종교가 성경을 떠나서 교권주의로 기울어진 증거이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이(利)를 취하려고 탐욕주의로 나간 증거이다.  그들은 돈을 위해서 종교의식을 거행하였고 돈밖에 모르는 자들이었다(미 3:10-11 참조).  종교가 타락되면 탐욕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이다(마 23:16-21, 25 참조).

• 2:15-16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엎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심판자이시므로 심판자의 위치에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정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책망하셨다.  마 21:13에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성전(내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사 56:7 참조).

기독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종교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종교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배우고 깨달아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종교이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이 물질을 따라간다는 것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것이다.  말세를 당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지도자가 많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계시고 또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24 참조).  하나님의 교회는 영이 살고 진리를 세워나가는 일을 본분으로 하고 성도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두 제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마 15:8에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세워나가는 일은 하지 않고 예배당을 지나치게 크게 짓고 사치스럽게 꾸미고 굉장한 의식으로 예배드려야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로 아는 것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이 된다.  오늘날 교회들이 외부적이고 의식적인 면에만 치우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영적 생명운동은 하지 않는다.  교회들이 양적 부흥에만 치우쳐 교인 모으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건물만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대 종교를 심판하신 주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이다.  교역자가 돈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고, 돈을 받고 축복기도를 해 준다면 예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항상 말씀대로 걸어 나가는 신앙생활을 하여야겠다.  말씀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발견하며 기도로서 신령한 세계에 좀 더 깊이 들어가 영이 사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고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자기 속에 이루어져서 생명이 소생하고 영혼이 자라나야 한다.  이렇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성도가 교회 안에 많아진다고 하면 교회가 소금의 직분을 잘하게 될 것이다.

• 2:17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것은 시편 69:9의 인용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하나님의 성전의 신성성(神聖性)을 보호하려는 열심이며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다.  또 하나님과 교통 하며 교제하는 신성한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다.

나를 삼키리라 내가 삼키워진다.  핍박을 받아서 내가 희생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이 까닭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주의 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으므로 책망하게 되고 정결케 하는 일을 하게 되므로(말씀대로 바로 세우려 하므로) 핍박을 받아 희생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느 시대나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며 바른 진리를 세워나가려고 하면 그것이 옳다고는 하면서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시기하고 핍박하고 배척하는 무리가 일어나고 심한 경우에는 죽이기까지 한다(요 16:2 참조).

• 2:18-19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할 때에 유대인들은 가책이나 회개도 없이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하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진리나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육신의 눈에 기이하고 이상한 표적만 구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다(마 16:1-4 참조).  그 뜻은 성전 되시는 예수님의 몸이 헐리어(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한다.  이것이 표적 중에 가장 큰 표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제일 큰 이적이고 그 이상 더 큰 이적이 없다.  또 이 이적 하나 밖에는 다른 표적을 보일 필요가 없다.  만 가지 이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기이한 이적을 보았다 할지라도 생명이 살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적이야말로 죽은 영혼을 살리며, 또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진리를 받게 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길이다.  이 이적 하나만 있으면 만족하고 충족하다.

•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예루살렘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 지었으나 그때까지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주전 19년쯤에 착공하여 이 사건 당시(주후 27년)까지 46년이 걸렸고 그 후 36년을 더 지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된 것은 주후 63년 경이라고 한다.  착공 후 완성까지 82년 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완공 후 7년 만인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우지 않고 다 헐리고 훼파되고 말았다.  82년이나 걸려서 아름다운 미석으로 꾸미고 굉장하게 성전을 지어 놓았지만 완공 7년 만에 훼파되고 만 것이다.  외부적인 성전만 아름답게 지어 놓고 내적 신앙은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적 산 교훈이다.  오늘날 교회도 예배당을 크게 짓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만 급급하며 외부적인 의식주의로 나가고 내적 생명의 역사가 없고 진리를 세우는 면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과 심판이 올 것이다.

•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라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만 생각하고 말하였으나 예수님은 성전 되시는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외부적인 것 물질적인 것만 보고 말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연재나 신령한 것, 생명적인 것, 진리적인 것, 그리스도 자신에 대하여 깊이 말씀해 주셨다.

•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의 참 뜻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그 뜻을 깨닫고 믿었다.  그 이유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고 보혜사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몰랐다.

• 2:23  유월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었다.

• 2:24-25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모든 사람을 다 아셨다.  사람의 속은 어떻게 생겼는가?  마가 7:21-22에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라고 하였고 갈라디아 5:19-21에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하였으며, 디도 1:16에는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람을 의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참으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썩은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의지할 바가 아니고 사랑할 바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걸어가셨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만 하셨다.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사랑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그 말씀이 증거하고 하시는 일이 증거 하며 또한 성령이 증거 하신다.  진리에 바로 서지 못한 사람의 증거는 받을 바가 못되고 따라갈 바도 못된다.  이러한 사람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말씀만 따라가야 한다.  사람의 인도를 받을 때에도 성경을 바로 가르쳐주는 참된 하나님의 일군은 우리가 신임하고 따라가야 하겠으나 성경을 잘못 가르칠 때에는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요한복음 히브리어 주일 설교문] 예수님 가나 혼인 잔치 사건(요 2:1-11)

 

[요한복음 히브리어 주일 설교문] 예수님 가나 혼인 잔치 사건(요 2:1-11)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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