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서 유대인 지도자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가르치는 복음 말씀이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밤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니고데모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구원받게 됩니다. 새롭게 탄생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도 복음 말씀을 들을 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십자가 복음만을 듣고 구원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 놓고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우리가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니고데모(요 3:1-12)
•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 즉 70인 공회(산헤드린)의 회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인 학자이었다(10절). 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밤에 예수께 와서 그와 높은 지위와 한자의 신분과 바리새교파의 영향으로 인하여 낮에는 예수님을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이다. 이 까닭에 공공연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요한 9:22에 보면 유대교인으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출교 하기로 결의할 정도로 예수를 극도로 반대하던 때였다.
이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낮에는 무서워서 실행하지 못하고 밤에 바알신당을 훼파하고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과 같다(삿 6:26-27). 니고데모가 낮에 떳떳하게 예수님을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온 것은 비열함을 면할 수 없으나 밤에라도 찾아와서 중대한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니고데모에 대한 기사가 본서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고(야간의 니고데모)(3:1), ② 예수님을 변증 하였고(변증의 니고데모)(7:50), ③ 예수님을 장사할 때에 향품을 넣었다(백주(白晝)의 니고데모)(19:39).
랍비는 선생이라는 뜻인데 그렇게 고귀한 지위에 있고 학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실 분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아직 외부적인 표적을 보고 인정하려는 정도이고 영적인 신앙은 없는 때였다.
•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줄 아시고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고 즉시 중요한 중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다.
◎ 중생의 정의: “거듭난다”는 것은 중생 혹은 다시 난다는 말인데,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믿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영이 다 죽은 것이다(엡 2:1, 요 5:25-26, 눅 9:60).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그 죽었던 영이 살아난다(엡 2:1, 요 6:63 참조). 이것이 거듭나는 것이요, 중생이다. 중생은 새 생명의 시작이요, 영적 생명으로 찰나(刹那)적인 전환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죽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알 수 있게 된다.
•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가 중생의 도리를 들을 때에 육신적으로만 생각하여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반문하였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성령의 일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을 아무리 지위가 높고 학식이 많다 하여도 영의 일은 깨닫지 못한다(고전 2:14 참조).
•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중생의 요소: 물과 성령이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말씀으로 중생한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하였으니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벧전 1:23에 “저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했다. 야고보서 1:18에도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라고 했다. 어떤 이는 물을 “회개의 눈물”, 어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창에 질리실 때 옆구리에서 나온 물”이라고도 하고 또 “세례(물세례) 주는 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생의 요소가 세례 주는 물이라고 하면 예수 믿어도 세례 받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이 된다. 세례는 신앙을 고백할 때에 죄 씻음 받은 표로서 외부적으로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세례로서 영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믿으면 거듭난 것이고 구원받는다. 예수님과 같이 못 박힌 한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믿고 세례를 못 받았어도 구원을 받았다. 또 회개의 눈물도 그 눈물로 죄 씻음 받을 수 없고 거듭날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려 쏟아진 그 물도 우리를 중생시키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본문의 물을 말씀 외에 다른 것이라고 해석하면 말씀 없이 거듭난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성경에는 맞지 않는다(약 1:18, 벧전 1:23). 눅 8:11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씨라고 했는데, 이 생명의 씨가 없이 어찌 새 생명이 시작(중생)될 수 있겠는가? 성경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그 말씀을 성령으로 믿게 한다. 그때에 죽었던 영이 살아난다. 중생과 신앙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논리적으로는 중생이 먼저이다.
•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과 영을 갈라놓지 않으면 신령한 도리는 깨닫지 못한다. 거듭나는 것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서 산 영이 된 것이요(요 6:63 참조),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롬 8:10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는 성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산 영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전 15:45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라고 했다. 범죄 하여 죽었던 아담의 영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산 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은 다 산 영이다. 이 산 영은 새 생명이요, 새 사람이다. 이 산 영은 성령이 늘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산 영 즉 새 생명, 새 사람은 전대로 범죄 하지 않는다. 요일 3:9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고 했다. 신자가 범죄 하는 것은 옛사람 즉 육체의 부패성 때문이다(엡 4:22-24 참조).
박 윤선 목사는 “그리스도 신자의 인격은 성경 말씀대로 보아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곧 옛사람과 새 사람이다(엡 4:22-24). 새 사람은 거듭난 생명이니 그것은 범죄 할 가능성도 없다”라고 했다.
•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중생의 도리가 육신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거듭난 사람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고 도리어 확실하다.
•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앓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중생은 성령의 단독적 역사이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중생시킨다. 중생은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협조나 노력 없이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단독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다.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특수한 경우 외에는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게 거듭난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그 결과를 보아서 알게 된다. 바람도 그 자체는 안 보이나 사물에 부딪칠 때 그 결과로 알 수 있다.
◎ 중생한 증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것이다. 요일 5:1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전부 중생한 자이다. 믿어지는 것이 택한 백성인 증거요, 중생한 증거이다.
중생한 영은 다시 죽지 않는다. 벧전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썩지 아니할 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기 때문에 한번 거듭난 영은 다시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뜻은 하나님과 단절될 수 없고 지옥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한 번만 하는 것이고 반복하지 않는다.
중생한 자는 벌써 영생을 얻어 놓은 것이다. 요한 5:24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했다. 예수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어 있다고 했다. 엡 2:6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밝히시니”라고 했다. 예수 믿는 자는 중생한 영이 살아 있으므로 절대 지옥가지 않고 친국에 들어간다.
•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는 아직 중생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생의 도리를 들을 때에 잘 깨닫지 못했다.
•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중생의 도리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사람이나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가! 오늘날에도 이러한 선생들이 많이 있다.
•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를 보고 그 세계에 거하시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말씀하실 것이다. 고전 2:14-15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나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
•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땅의 일은 중생의 도리를 가리킨다. 중생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고, 사람이 체험하여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땅의 일이라고 했다.
하늘의 일은 객관적인 신령한 일, 즉 다음절에 나오는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일과 같은 도리를 말한다. 자기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는 다른 신령한 도리를 전연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 이 다.
[요한복음 히브리어 주일 설교문] 예수님 성전 정화 사건(요 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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