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하나님 말씀

[히브리어 성경 복음말씀 아가서]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 노래(아 1:1-7)

베들레헴 2021. 12. 4. 19:53
반응형

아가서 1장에서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사랑하여 고백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생각하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구속사 관점에서 성도를 상징한다면 솔로몬 왕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 노래(아 1:1-7)

 

1절 쉬르 하쉬림 아쎄르 리쉘로모

• 1:1 솔로몬의 아가라

※ 왕의 말 (1)

아가(雅歌)의 히브리 원어 (쉬르 하쉬림)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으로, “노래 중 가장 뛰어나고 귀한 노래”를 말한다. 솔로몬이 지은 노래가 일천 다섯이나 되는데(왕상 4:32) 아가서는 그 가운데 일부라고 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다. 아가서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육적으로 이용하면 거룩한 것을 속(俗) 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도와의 신령한 관계를 배워야 한다.

2절 이솨케니 미네쉬코트 피후 키 토빔 도데이카 미야인

• 1: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술람미 여자의 말 (2-4)

술람미 여자는 “신령한 성도”를 가리키고, 예루살렘 여자는 “보통 성도” 혹은 “육신에 속한 성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신자 중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입 맞춰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접촉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술람미 여자(신령한 성도)는 예수님을 가까이하며 영적 교통을 하며 교제하기를 원한다. 예수님도 성도가 멀찍이 따라다니는 것을 원치 않고 좀 더 가까이 나아와서 신령한 교통을 하는 것을 원하신다.

예레미야 35장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말씀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예수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말이다. 포도주는 달콤하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삿 9:13; 시 104:15),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한다. 이처럼 예수님 의 사랑은 달고 성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사랑에 도취가 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그 목적은 주님이 하시는 구원 운동(생명운동)은 변화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요 2:1-11).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하고, 달고 도취가 되게 만들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간 성도 라야 신령한 성도이다. 그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랑의 단맛을 알고 즐거워하며 그 사랑에 이끌리어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레레아흐 쉐마네이카 토빔 셰멘 투라크 쉐메카 알 켄 알라모트 아헤부카

•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자랑하는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이것은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그것이 참으로 향기롭다는 뜻이다.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예수님의 이름은 향기롭다. 그 향기는 모든 더러운 냄새를 제거하며 썩어져 가는 것을 방지하고 좀이나 벌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더러운 마귀는 예수님의 이름에 놀라서 도망친다. 또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심령 속에서도 향기가 넘쳐 나오게 된다.

처녀들이 너를 자랑하는구나 처녀들은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마 25:1-13; 고후 11:2).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지극히 큰 사랑을 깨닫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모한다.

4절 모쉐케니 아하레이카 나루차 헤비아니 하멜렉크 하다라이브 나길라 베니세므하 바크 나제키라 도데이카 미야인 메솨림 아헤부카

[에스겔 1장 설교 말씀] 에스겔이 본 네 생물 환상(겔 1:1-14)

•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예수님이 술람미 여자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였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여자(보통 성도)는 침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왕을 따라다니면서 섬길 뿐이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신령한 성도)는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침궁에까지 들어간다. 침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교통을 하며 동거 동락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더불어 교통 하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세계 밖에서 예수님을 섬긴다. 우리도 좀더 신령한 자리,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자리에까지 들어가는 믿음을 가져야겠다. 마태복음 6:6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고 또 거기서 보시고 거기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의 인도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5절 쉐호라 아니 베나바 베노트 예루솰람 케오홀레 케다르 키리오트 쉘로모

•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 술람미 여자의 말 (5-7)

예루살렘 여자들아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술람미 여자가 외적으로는 아무 보잘것이 없으나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영적으로 주님과 교통 하며 동행하는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간증하려는 것이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술람미 여자가 얼굴이 검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가 얼굴이 검게 된 원인은 일광에 쬐었기 때문이다(6절).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검어졌다는 것 은 세파에 시달려 얼굴이 보잘것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술람미 여자는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을 받는 동안에 겉모습이 보잘것없이 된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사모하여 들로 산으로 헤매며 다니느라고 얼굴이 검어졌다. 그래도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과 속 사람을 보신다. 술람미 여자가 외모는 보잘것없으나 그 중심과 속 사람은 실로 아름답다.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달”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 그 족속은 검은 염소털로 만든 장막을 치고 유목생활을 하였다(창 25:13; 사 21:17). 그러므로 계달의 장막 같다는 것은 염소털같이 검고 너저분하여 아무 모양이나 광채나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가 외모로는 아무 보잘것없으나 예수님 보시기에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호화 찬란하다는 것이다.

믿음 지키기 위해서 환난 받는 성도가 비록 외모는 이렇게 계달의 장막같이 변변치 못하고 보잘것이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주 호화롭고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이와 반대로 외모를 아무리 아름답게 단장하고 호화로이 꾸몄을지라도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하는 성도는 예수님의 눈에 계달의 장막과 같이 추하게 보인다. 우리는 외모를 꾸미지 말고 속 사람을 단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신령한 세계(침궁)까지 들어가 예수님과 교통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6절 알 티르우니 쎄아니 세하르호레트 쎄쎄자파트니 하솨메쉬 베네 임미 니하루 비 사무니 노테라 에트 하케라밈 카르미 쎌리 로 나타르티

•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자가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미의 아들들이 그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 때문에 그 포도원에 가 있는 동안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된 것이다.

일광(日光)에 쬐어서는 세상 풍파에 시달린 것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지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 얼굴이 검게 되었다. 흘겨보지 말 것은 업신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어미의 아들들 육신의 친척들과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를 노하여 세상 사람들은 술람미 여자가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의 말씀만 따라가므로 노하였다.

[창세기 5장 설교말씀] 아담의 족보와 에녹의 승천(창 5:1-32)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이것은 육신의 친척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아서 세상 일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술람미 여자가 그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환난을 받았다. 또 세상의 모든 일로 시달리는 동안에 얼굴이 거무스름해졌고 외모가 보잘것없이 되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는 그 가운데서 신앙을 잘 지켰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예수님께 가 있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주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며 예수님의 명령을 잘 지켰다.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첫째로 하고 포도원 지키는 것은 둘째, 셋째로 했다. 그러므로 포도원은 잘 지키지 못하였다. 성도가 비록 세상 일을 맡아서 일해 나가면서도 믿음을 잘 지켜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그런 성도를 예수께서 기뻐하신다.

욥기 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했다. 욥이 그 많은 재산이 다 없어졌고, 아들 일곱, 딸 셋이 한꺼번에 다 죽었고, 또 몸에는 병이 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아내에게 배척을 당했다. 그렇게 많은 시련을 당한 것이 곧 일광에 쬐어 거무스름해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욥은 믿음을 지켰고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다 통과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믿음 지키느라고 세상 일을 제대로 다 못했다는 것이다. 성도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믿음 지키는 문제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거나 하면 부모 공경을 제대로 못하고 또 가정도 제대로 잘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부친을 작별하고 따라갔다(마 4: 18-22). 그것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 일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정에서 자기 할 일을 잘해야 되고, 부모를 잘 공경해야 되고, 또 자녀를 잘 길러야 되고, 직장에도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 그로 인하여 세상 일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만 잘 따라갔다고 하면 대성공이다.

7절 하기다 리 쎄아하바 나페쉬 에카 티르에 에카 타르비츠 바초호라임 샬라마 에흐예 케오테야 알 에드레 하베레이카

•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부르는 말이다.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이 양 떼를 어디서 먹이는지, 어디서 쉬게 하시는지, 그곳을 알아서 자기도 거기에 가려고 찾는다. 성도는 어떻게 하여야 주님의 신령한 양이되고 어떻게 믿어야 주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가,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주님이 생명 운동을 하시는가, 그곳에 가려고 애쓰며 찾아야 한다. 어디 가서 배워야 바로 배우며 어느 곳에 가야만 주님과 같이 안식할 수 있는지 애쓰며 찾아야 한다. 성도는 생명의 꼴을 먹을 만한 곳에 가서 꼴을 먹고 그 생명이 살고, 안식할 곳을 찾아 안식을 누려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필요한 꼴을 먹이셨고, 초대 교회 시대에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필요한 양식을 공급했고,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양 떼들을 먹였고, 종교 개혁 시대에는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고, 일정 말기 신사참배의 환난 때에는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등을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다.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에 양떼를 바로 먹이는 곳(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어디인가, 또 생명을 살리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자기 생명이 살아야 한다.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부끄러울 때 얼굴을 가린다. 성도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잃어 버렸거나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자기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면 주님 앞에 부끄럽다. 하나님의 진리가 예수 믿는 사람 속에서 영적 양식이 되어야 하고, 또 그 시대에 바른 진리를 세워나가며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기쁘고 떳떳하게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참된 양식(꼴)을 먹지 못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없으면 동무 양 떼 곁에서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가 무엇이 떳떳하겠는가? 예수님의 양떼 먹이는 곳에 가서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오정에 쉬게 하는 곳에 가서 영적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술람미 여자는 이런 자가 되지 않으려고 그곳을 애써 찾는 것이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말씀 전도서] 인생이 허무한 이유에 관한 고찰(전 1:1-11)

 

[구약 히브리어 성경말씀 전도서] 인생이 허무한 이유에 관한 고찰(전 1:1-11)

전도서 1장에서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사람입

bethlehem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