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3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여호수아가 죽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이방 백성을 통해서 시험하셨다. 성도는 예수님을 잊고 살면 안 된다.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백성들과 통혼했고 우상을 섬겼다.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삿 3:1-7)
우리는 여기서 가나안의 옛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원주민들 중에는 연합된 부족을 유지해 남아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3절). 이들이 바로 “블레셋 다섯 방백”이다. 즉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그리고 에그론이었다(삼상 6:17). 이 도성들 중 셋은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정복되었다(1:18). 그러나 블레셋인들이 그 땅들을 다시 자기들의 것으로 복귀시킨 듯이 보인다(아마 그후로는 서로 동맹을 맺어 강화된 다른 두 도성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도성들은 어떤 원주민들보다도 더 이스라엘을 당황케 했고, 사사 시대 후기에와서는 더욱 그랬다. 이들은 다윗의 때까지 결코 완전히 탈환되지 못했다.
또한 특별히 가나안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영토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돈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레바논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히위 족속이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외진 그 곳에서 그들은 아마 인근 몇 나라들 중 어떤 나라들에 의해 도움을 받아 유지된 족속 같다. 그러나 이런 부족들 외에,
그 땅 모든 지방 어느 곳이나 그 민족들 중에 산재해 있는 족속들(5절), 즉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묵인과 관용되었다. 그것은 지나치고 오만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 사이에 거하였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마치 권리가 아직 가나안인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단지 소작농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 이제 원주민들 중 이들나머지들에 관해 살펴보자.
Ⅰ. 하나님이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은 얼마나 현명한 일이었던가? 이스라엘을 바르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남겨 두신 것에 대해, 앞 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위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해석이 첨가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행위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이익을 위해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이다. 즉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알게 하려 함”이었다(1, 2절).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단련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도였다.
1. 왜냐하면 그들의 땅은 “심히 풍요하고 비옥하였고,” 모든 종류의 음식이 손쉽게 얻어졌기에 고생을 겪지 않으면 극도의 사치와 유약성에 빠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투사들까지도 무기를 오래 쓰지 않아 여인들과 같이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 우유와 꿀뿐만 아니라 때로는 피의 고난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기질은 위대하고 선한 모든 일을 파괴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리한 성질이었다.
2. 또한 그들의 나라는 수많은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침략을 당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산업이 “무늬 있는 매와 같았고 매들이 그를 에워쌌던” 것이다(렘 12:9). 그러므로 그들은 변방에 침략이 있을 때 잘 막아내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훈련될 필요가 있었다. 전술은 체험을 통해 가장 잘 습득되는 법이다. 즉 이 체험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군사적인 훈련에 숙달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군사적인 기질로 그들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항해사를 육성하는 것이 섬나라의 사업인 것과 같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 그래서 더 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보행자와 함께 달림”으로써 “말과 경주”하게 하려고 하셨다”(렘 12:5). 이스라엘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은 고난을 견뎌야 한다(딤후 2:3). 그래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심중에 타락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전신갑주”를 입게 되고 전술을 익히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 패트릭 주교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사”라는 본문 2절에 대해 다른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열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웠다. 하나님은 전쟁을 하도록 그들의 손들을 가르치셨고 싸울 수 있도록 그들의 손가락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잃고 말았으므로 이제 하나님은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다는 것이다.
Ⅱ. 이스라엘은 얼마나 사악하게 가나안 족속의 남은 자들과 혼합되었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겨 두신 자들에게서 의도하신 일은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4절).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성실한 자들이 우상 숭배로 이끄는 가나안 족속의 유혹을 이기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함이며, 어리석고 불성실한 자들이 그런 유혹에 굴복해 수치를 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도 반드시 이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9). 이 시험의 결과 이스라엘은 악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면 그들의 영예나 재산에 이득을 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통혼했다(6절). 이런 혼인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혈통을 더 순수하게 하는 대신 더럽혔으며, 그들의 재산도 증가시키는 대신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2. 또한 그들은 우상 숭배도 하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6절), “바알들과 아세라들”(7절)을 섬겼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예배드린 형상들이란 일종의 자연 그대로 있는 신단인 통나무에 새긴 상들이었다. 이처럼 불균형적인 양립에서는, 썩은 사과와 신선한 사과가 같이 놓여 있을 때처럼 좋은 것이 나쁜 것을 개선하기를 희망하기보다는 나쁜 것이 선한 것을 부패시키기가 훨씬 쉽다는 생각이 타당할 것이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을 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이런 새로운 친척들에게 만족하게 되자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고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그들이 그 분 아래서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될지에 대해서도 모두 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관심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악이 시작하게 된다.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한” 것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 때문이다(렘 3:21).
[헬라어성경 누가복음 3장 강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눅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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