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장에서 하나님은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는 일을 잘 모른다.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인간이 알 수 없다.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여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전 3:11-15)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세계를 발견하겠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여기서 솔로몬은 그 모든 변화들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우리에게 나타난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길을 항상 그분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최고도로 선용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그것을 잘 믿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그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11절). 그러므로 시간의 지속하는 한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즐거워해야만 한다.
1.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대로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신 대로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2. 우리에게 가장 기분 나쁘게 보이는 것도 제때가 되면 아주 어울리는 것이 된다. 더위가 여름에 어울리는 것처럼 추위는 겨울에 어울린다. 제 차례가 되어 돌아오는 밤은 캄캄한 아름다움이고, 제 차례가 돌아온 낮은 밝은 아름다움이다.
3. 신의 섭리와 그 모든 경륜에는 놀라운 조화가 있어서, 섭리 안에서 되어지는 사건들은 그 시기와 함께 관련성이나 경향성을 고려해 보면 매우 아름답게 나타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섭리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금은 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가 완성되는 때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가장 적당한 때에 행하여진 것으로 보일 것이요. 그것은 영원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신 32:4; 겔 1:18).
Ⅱ. 우리는"하나님이 태초로부터 종말까지 만드시는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지금 얽히고설켜서 뒤죽박죽 된 것 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 완전한 발견을 할 수 있기 위하여는 인내로써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 전까지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창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섭리에 있어서도 만사는 잘 행해진다. 그래서 종말이 올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집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그의 마지막 손질을 가하고 완성시키는 화필을 대고 난 뒤에라야 그 전체가 매우 훌륭하게 나타나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서 보는 것은 단지 그 중간 부분이어서 그 처음부터 보지도 못했으려니와(만약 보았다면 그 계획이 신의 의향 속에 얼마나 훌륭히 담기어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었다) 그 행동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또한 보지 못할 것이다(만약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이 얼마나 영화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휘장이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진행과정을 나무라거나 판결을 내리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저희 마음속에 두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다.
1. 혹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왜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보다 많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삼는다. 이에 대한 펨블(Pemble)씨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롭고 공평하고 아름다운 사물의 배열에 대한 증언을 하시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신 게 아니라, "세계"라는 책 속에서 관찰되도록 그것을 나타내셨고 이것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셨다. 즉 인간사의 진행과 함께 자연의 역사를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염원과 능력을 인간에게 주셔서,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열중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대상 가운데에서 놀랄 만한 질서와 편리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처럼 모르는 것일까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 이에 대해 레이놀즈(Reynolds) 주교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너무나 많이 마음을 두며, 세속 된 생각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세상 일들에 대한 우리 수고에 너무 매여 있어서 그 세상 일속에 뻗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없다."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소유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편견까지도 형성하였다.
Ⅲ.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는 우리 분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묵묵히 따라야 하며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 이 일들 가운데는 확실하고도 지속적인 "선이 없다." 그러나 그 일들에는 어떤 좋은 것이 있는지 여기에 나타나 있다(12, 13). 우리는 그들을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타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가난한 자와 대중에게 그리고 대중과 종교의 이익을 위해 선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몇 가지 유용한 봉사를 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우리 존재와 기능과 지위를 가지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다. 가장 참된 즐거움은 선을 행하는 데에 있으며, 그렇게 행한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저축이며 또한 가장 훌륭히 인정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 시간"은 바로 짧고도 불확실한 "이 생"에서이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시간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을 행하는 장소는 바로 "이 생에서"이다. "이 생에서" 우리는 저 다른 생을 위한 시험과 견습의 상태로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생은 자기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어 줄 것을 행하는 기회인 것이다.
2.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편안히 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우리 수고의 낙을 즐기자." 그래서 우리가 수고한 낙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며, 그의 사랑을 맛보고 그에게 감사를 돌리며, 그를 우리 기쁨의 중심으로 삼자. "먹고 마시는 것"도 그의 영광이 되도록 하며 "모든 것이 풍부한 가운데 마음의 기쁨으로 그를 섬기자." 만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토록 불확실한 것이라면, 자기 뒤에 올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저축하려고 현재에 있어서 그것을 아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즐겁게 살고 유용하게 살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좋은 선물로서 그의 섭리의 무한한 은혜가 주시는 선물 중 으뜸가는 좋은 선물인 것이다.
Ⅳ. 우리는 신의 섭리가 개인적 관심사나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 내리시는 모든 처분을 전적으로 흡족히 여겨야 하며 그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틀어 우리에게 지정된 일을 수행하시며, 그의 뜻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시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1. 그 계획은 변경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복종하여 행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하나님께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하는 자는 누구나가 이것을 안다)(14절). "그는 단 한 가지 마음이신데 누가 그를 돌이킬 수 있는가?" 그의 방침은 꺾이는 법이 없고 새 계획을 더하게 되지도 아니하며, 그가 의도하신 일은 시행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을 좌절시키거나 취소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계획과 이해(利害)에 어긋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2. 그 계획은 변경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 안에 잘못이 없으며 수정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그 광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완전한 것일 것이다. "그것에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며, 또 "그것으로부터 털어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불필요하거나 남아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일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우리가 더하거나 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시 4:2). 따라서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게로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의 이득인 동시 의무가 된다.
Ⅴ. 우리는 신의 모든 섭리에 나타난 그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를 경건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할 모든 일을 행하시는데," 이것은 인간들 위에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과 그들의 모든 길은 그의 처분 아래 있고, 시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사건도 그의 수중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께로 그 눈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저희 모든 길에서 그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인간들이 만사에서 그를 기쁘게 하기에 세심한 배려를 하게 되고 어떤 일로든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처분을 변경시키시지만, 그의 의향에는 변화가 없으셔서 우리를 혼란시키지 않으신다. 더구나 그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실 리는 없으며, 오히려 자기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이 세상의 통치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종교를 고무시키고 진전시키는 일이다.
Ⅵ.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변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범접(犯接)할 수 없는 일관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가 뜨고 지며 달은 차고 기울지만 다 그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그 운행은 "하늘의 법도"를 따라서 태초로부터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이다(15절). "이미 있어 왔던 것이 지금도 있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최근에 와서 사용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니다. 사물들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항상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장차 있을 것도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세상은 지금만치 나쁘진 않았을 거야"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우리가 겪는 실망만큼 허무한 것을 경험한 자는 여태껏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거나, "시대는 결코 고쳐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지각없는 말이 된다. 시간은 우리를 개선시켜 줄 수 있으며, 슬퍼하는 시간이 지나면 기뻐할 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공통된 성격과 공통된 운명에 빠지기 쉽다. 세계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기 쉽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이전에 행하신 것을 반복하시며, 그가 지금까지 선량한 사람들을 다루어 오던 것과 꼭 같이 우리를 대하신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땅을 버리며 바위를 제 자리에서 옮겨갈 것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며, 그로 인하여 어떤 특별한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은 "단지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형통한 중에 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나간 고통을 다시 부르실 수 있으시며, 옛 고생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우리의 환락을 빼앗고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시 30:7). 그러나 역경 속에 있다고 하여 낙담하지도 말 것이니 하나님은 욥에게 행하신 것 같이 과거의 위안도 다시 대령시킬 수가 있으신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행동과 환경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의 태도에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하여서도 우리를 문책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갈 때는, 번영하였든지 고생을 당하였든지 간에 우리의 이전 상황 속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주일설교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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