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하나님 말씀

[에스겔 3장 성경 복음 설교말씀]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겔 3:16-21)

베들레헴 2022. 12. 1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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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파수꾼으로 사명을 받는다. 파수꾼은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는다. 지금도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겔 3:16-21)

 

"칠일의 끝에" (개역-" 7일 후에"), 하나님은 이 예언자에게 계속해서 지시 사항을 말씀하셨다. 즉 에스겔이 환상을 본 후 제7일째 날이었다. 아마 에스겔이 환상을 보았던 날과 이 지시를 받았던 날은 모두 안식일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 은 비록 사로잡혀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처지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안식일을 준수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자들과 지배자들이 애굽의 십장(공사감독)들이 옛날에 했던 것과 같이, 일정한 업무 분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묶어 놓았다는 사실을 여기에서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은 자기들이 이방인들과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안식일 휴식을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안식일 날의 업무를 위한 성전이나 회당이 없었다. 단지 사도행전 16장 13절에서처럼, "기도처로 모이는 강변의 한 장소"가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안식일이면 그들은 거기에 모였다. 또한 거기에서 그들의 적들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로 조롱했다(시 139:1, 3). 그곳에서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났으며, 그때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해 왔던 에스겔은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기에 적합했다. 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준비를 잘한 셈이었다. 이 안식일에는 에스겔이 먼저 번 안식일에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에스겔을 아주 쉬운 비유로써 자기의 의무를 명백하게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로는 특수한 경우에 축제의 기쁨을 갖지만, 기쁨의 환희와 희열이 그들의 매일의 양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비록 때때로처럼 항상 가시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사귀지는 못하지만, 역시 하나님과 진실로 교제하고 있다는(요일 1:3)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늘의 왕국의 신비와, 때로는 눈에 보이지만, 보통으로는 분명한 설교로 나타나며, 이것이 사람을 교화시키는 데는 제일 좋은 방식이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예언자에게 이전의 그의 직책과 그 직책의 의무에 대해서 말한다. 에스겔에게 주어졌던 이런 직책과 의무는 생각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백성들이 에스겔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실행케 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백성들에 대해서 주는 책임을 알고 중히 여기며, 그 책임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예언자가 다시금 소명받은 직능은 무엇인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 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17절).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을 그를 놀라게 했다. 에스겔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처럼 명백한 비유를 사용하시어, 에스겔이 자기의 임무를 보다 잘 깨닫고 이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 중에 거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임해서 본인이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신다. 에스겔은 "파수꾼"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 말이 있다. 그는 도성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임명받았으며, 평화를 깨뜨리는 자와 도적과 화재를 감시해야 한다. 또한 양 떼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도적들과 맹수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그는 특히 진영이나 침범당한 나라 또는 포위된 마을 가운데 있는 "파수꾼"으로서 적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적이 접근하거나 위험이 초래되려 할 때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족속" 이 전투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주며, 음흉하고 끊임없이 공격하려 하는 적들에게 그들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 이스라엘 족속의 각자가 위험에 처해 있으며 파수꾼의 위치에 있다. 사역자들은 "교회의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들"이며(사 62:6), "성읍을 순회하는 파수꾼"이다(아 3:3)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고생스러운 직책이다. 파수꾼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기에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으며, 적국을 감시해야 하므로 (긴장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어떤 날씨에도 "망대 위에" 서 있어야 한다(창 31:40; 사 21:8). 그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직책이다. 때때로 그들이 그들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적은 파수꾼을 죽이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의 위치를 떠날 수 없으며, 그들이 위치를 떠날 때는 상관으로부터 오는 죽음에 처하게 된다. 이런 딜레마가 교회의 파수꾼들에게 있다. 만약에 파수꾼들이 그들의 임무를 성실히 행할 때면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며, 그들이 거짓되게 행할 때면 하나님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요한 직책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파수꾼들 없이는 안전할 수가 없었으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이다" (시 127:1, 2).

Ⅱ. 이 직능의 의무는 무엇인가? 파수꾼의 임무는 살피고 알리는 일이다.

1. 파수꾼으로서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하여 하나님이 말했던 것과, 예레미야나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의 일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에스겔은 다른 파수꾼처럼 위험을 탐지하거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을 주시해야 한다. 그 외의 것을 살필 필요가 없다. "내 입의 말을 들으리라" (17절). 전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먼저 배우지 않고 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예언자는 그가 들었던 것을 알려야 한다. 파수꾼은 눈을 가지듯, 예언자는 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예언자가 벙어리가 된다면, 그것은 파수꾼이 장님이 되는 것처럼 나쁘다(사 66:10).

너는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깨우치고,"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에스겔 자신의 이름으로나 그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경보이다. 사역자들은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이다. 성서는 우리를 훈계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성서로 인하여 주의 종이 훈계를 받나이다" (시 19:11). 그러나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해진 말씀이 더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의 훈계를 우리에게 전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제 말씀을 전함으로써 에스겔 예언자는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분해야 하며,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알맞게 주어야 한다. 만약에 그가 이와 같이 행한다면(그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는 그 일로 인해 위로를 받을 것이며, 만약에 이와 같이 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1) 에스겔이 대해야 하는 사람 중 더러는 사악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그 악한 행위를 계속하지 말고 죄악에서 떠나라고 경고해야만 한다(18, 19절). 여기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1] 만약에 사악한 자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거하면, 그는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과거에도 말씀하셨고 현재도 말씀하신다. "그의 죄악" 이 분명히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죄악은 파멸로 항하며, 파멸 가운데서 끝날 것이다. "악인은 죽겠고," 비참한 죽음으로 "죽을 것이며," 영원히 "죽겠고," 결코 시체가 되지 않고 죽음을 항상 죽을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며," 죄악 아래에서 "죽겠고," 그 죄악의 지배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2] 만약에"악한 자가 그의 악과 악한 길을 떠나면, 그는 살 것이며," 파멸이 그를 위협할지라도 그는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을 행하면, 경고받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가 악을 계속하면 "죽을 것이요," 회개하면 "살 것이다." 악인은 "그의 사악함"과 "그의 사악한 길을 "떠나야 한다는 점을 주시하자. 사람이 "자기의 사악한 길을 떠나려" 한다면, 피상적인 회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회개는 그가 죄를 떠났다기보다 죄의 영향이 그를 떠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사악함을 떠나야" 하며, 마음 깊은 곳의 중생으로써 죄악에 대한 사랑과 경향성으로부터도 돌이켜야 한다. 만약에 그가 "그의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다면, 그가 "그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킬 희망이란 거의 없다.

[3] 죄인들에게 죄악의 위험을 경고하고 회개의 이로움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사역자의 임무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서 행하면 얼마나 큰 불행이 닥칠 것인가를,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면 얼마나 많은 행복이 그들 앞에 놓이게 되는가를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자들은 "생사의" 문제에 관계하며 "축복과 저주"에 관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

[4]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악한 자들에게 닥칠 불행과 위험을 경고해 주지 않을지라도, 죄악을 계속하는 자들은 변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파수꾼이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이미 충분한 경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요, 만약에 죄인들이 그 경고를 받아들이면 그의 임무를 행한다면 그들은 저들의" 생명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5] 만약에 사역자들이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죄인들에 대해서 죄의 숙명적인 결과를 깨우쳐 주지 않고,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사역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멸망한 사람들의 "피 값은 사역자들의 손에서 찾게 될 것이다." 또한 심판 날에는 각각 귀중한 영혼들이 죄 가운데서 죽은 책임이 사역자들과 그들의 불성실에 있음을 추궁당할 것이다. 사역자들이 죄인들을 깨우쳤었다면, 죄인들이 "다가오는 진노를" 피할 수 있었을지 누가 알랴! 죽을 몸을 살인하는 것을 방조한 것도 흉악한 죄이거늘, 불멸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일에 대한 방조죄야 오죽하랴?

[6] 만약에 사역자들이 죄인들을 깨우치는 의무를 다하면, 비록 죄인들이 그 깨우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역자들은 죄인들의 "피 값에는 깨끗하고," "자기들의 생명은 구한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비록 그들의 일이 성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보상을 얻을 것이다.

(2) 에스겔이 대해야 할 사람들 중 일부는 "의로운" 자들이며, 적어도 자비로운 심판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들에게 신앙을 저버리거나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해야 했다(20, 21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1] 세상에 있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도 배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필요하며, 그들도 배교할 위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중지해서도 안 된다는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시 19:11). 타락을 막아 주는 한 선한 수단은 항상 타락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는 일이다(히 4:1). "그러므로 두려움을 가지자." 그리고 "믿음으로 선 자들" 일지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두려워해야 한다" (롬 11:20). 그러므로 의로운 자도 경계를 받아야 한다.

[2] 사람이 "돌이켜 설" 여지가 있는 "의," 외관상의 "의"가 있다. 만약에 사람들이 이러한 의를 떠난다면, 그 의가 설혹 통용(通用)되고 그럴듯한 것일지라도, 그 의는 결국 거짓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기" (요일 2:19)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며," 그들의 얼굴은 하늘을 향하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하며, 처음에는 사랑을 가지지만 후에는 그것을 잃으며 "거룩한 계명에서 돌아선다."

[3] 사람들은 "그들의 의에서 돌아서면" 곧 죄악을 범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할 때, 악마의 유혹에 희생되기 쉽다. 태만은 범죄에 이르는 길이다.

[4] "사람들이 그들의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며," 그들은 멸망으로 다가갈 때까지 더욱더 악하게 될 것이다.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했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등을 돌리고, 하나님 섬김의 의무를 버리고, 그 의무를 비난할 때,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을 행하사 구속의 은혜를 거두어들이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마음의 욕망에 버려둘 뿐만 아니라, 그의 섭리에 의하여 그들을 파멸을 재촉하는 그런 상황에로 이르게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벧전 2:8)이다.

[5] 사람들이 포기하는 의는 그들의 명예에나 위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배교자들은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는다. 그들의 봉사와 고난이 헛된 것이 되며 계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도움(이익)도 가져올 수 없다. 오직 끝까지 행한 것만이 참된 행위이다(갈 3:3, 4)는 것이 율법의 원칙이다.

[6] 만약에 사역자들이 아무리 선한 사람들이라도 잘못을 범하고 타락하기 쉬운 경향성과 또한 저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 유혹과 배교의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서 깨우쳐 주지 아니하면, 배교한 자들의 멸망이 문간에 쌓이리니, 사역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깨우침을 받아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그러하지 않다. 여기에는 악한 자에 관계되는 그런 경우가 나와 있지 않다. 반대로 깨우침을 받은 "의로운 자"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죄를 행하지 않는다" (21절). "현명한 사람에게 교훈을 주면, 그는 더욱더 현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자에게 아부해서도 안 되지만,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자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부해서는 안 된다.

[7] 만약에 사역자들이 사람들을 깨우치고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양자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복종하는 귀에 대한 현명한 책망자"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전자는 "그가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에 살 것이며," 후자도 "그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선한 사역자라면 "그 자신을 구원하는 일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 밖에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딤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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