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하나님 말씀

[요나 3장 주석 성경말씀] 요나의 새로운 사명(욘 3:1-4)

베들레헴 2022. 12. 25. 14:15
반응형

요나서 3장에서는 요나가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에 복음이 선포되기를 원했다. 요나는 그것이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고 하나님을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가 그 안에 들어가 회개하고 나와서 니느웨로 가기로 순종했다. 요나를 니느웨 성을 하루 동안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요나의 새로운 사명(욘 3:1-4)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과 요나 간의 화해에 대한 증거를 또 보게 된다. 그 양자 간의 쟁변은 파도처럼 드세었지만 이제는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

Ⅰ. 요나는 새로운 사명을 위촉받고 거기에 기꺼이 순종한다.

1.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자기 사업에 등용하신다는 사실로 그가 요나와 완전히 화해를 하셨다는 것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이전의 불복종을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증거였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에게 직임을 부여하게 되면 사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마땅히 간주할 수 있듯이 요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1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요나는 이전의 불순종을 진심으로 회개했는지의 여부를 시험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기한 형벌을 받고 진기한 구원을 받았다. 이 두 가지에는 모종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이 선한 의도에 부응할 수 있는지 증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일과 의무를 저버렸고 그 때문에 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안에서 죽음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복종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석방하셨고 그에게 그의 목숨을 주셨으며 그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 것은 그의 선한 태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뜻을 좇을 것인지 시험대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바다에 던짐을 당하고 거기서 다시 올라온 뒤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에게 "요나야, 너는 이제 니느웨로 가겠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반드시 이기실 것이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실 것이다. 그는 불순종하는 완강한 자식도 결국 당신의 발 앞에 데려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내리시며 우리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실 때 우리는 "이제는 너희가 전에 게을리했던 의무로 돌아가거라. 이들 섭리는 너희를 그 의무로 부르고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전신불구자를 고치신 뒤 하신 말씀과 다름없다(요 5:14).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제 가서 더 심한 것,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누워 있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난을 내리시고 또 그 고난에서 그들을 구출하실 때에는 인간의 태도를 주시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그 잘못, 특히 징계받은 과오를 고치려 하는지 않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나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징계나 구원은 다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2) 요나는 신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요나에게 불신감을 표시하는 말씀을 하셔도 무방했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거나 표리부동하게 대하는 사람을 당장 엄격한 법에 고소하거나 망치려 들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를 신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의 영도 요나가 항거하고 반역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로써 그에게서 떠나야 마땅했다. 그가 비록 목숨을 건졌지만 다시 선지자의 신분으로 봉사할 만한 능력과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할 것이지만 보라! 여호와의 말씀은 다시 그에게 임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잊어버리시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자에게는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주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탕자 되고 불순종의 종이었던 자들을 다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을 이전의 지위로 회복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신다는 것은 우리와 화목하신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이로써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호의를 품고 계시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그의 선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부요함을 찬미하고 주 예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시인할 이유를 갖는다. 이는 주 예수께서 인간을 위해 심지어 패역한 자를 위해 선물을 받으사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중에 거하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 가운데서 그들을 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시 68:18).

2. 이로써 요나가 하나님과 잘 화해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제 그는 전과 달리 하늘의 이상에 불순종하지 않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지 않았다. 그는 명령의 경청을 회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행길이 너무 멀다거나 비위에 맞지 않는 심부름이라거나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하여 반대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심판을 경고해도 만일 그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규탄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거나 본국의 불회개가 책망을 받게 될 것을 꺼려하여 그 명령에 불복종하지도 않았다. 그는 불평이나 논란이 없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갔다(3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회개의 본질. 회개는 우리의 언행심사를 바꾸는 것이며 이탈했던 우리의 일과 의무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회개는 우리가 행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선을 다시 행하는 것이다.

(2) 고난의 혜택. 고난은 버리고 떠나갔던 자들을 제 자리로 환원시켜 준다. 요나는 다윗과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러므로 고난당한 것이 비록 내게 두렵고 고통스러우며 당장은 기쁘지 않고 슬펐을지라도 그것은 내게 유익하였으며 참으로 유익이었나이다" (시 119:67, 71 참조).

(3) 고난과 함께 역사하는 신적 은혜의 능력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난 그 자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기보다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서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수 있으시며 (눅 1:17), 그 목이 쇠심줄 같던 자들을 그의 권능의 날에는 기꺼이 그의 멍에 아래로 들어오게 하신다.

(4)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를 살펴보라. 그들은 모든 면에서 그 말씀에 순응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에 충실히, 즐거이 복종해야 한다. 요나는 일어났다. 그는 게으름을 피우며 가만히 앉아 있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는 곧장 니느웨로 갔다. 느니웨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이전에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 하며 그가 부르실 때 와야 하고 그가 명하시는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에게 주어진 명령이나 사명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살펴보자.

1. 요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니느웨와의 전쟁을 포고하기 위해파견된 전령이었다(2절). "일어나 저 큰 성읍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하라." 우리에게 선포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듣고 경고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선포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믿음을 거기에 혼합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를 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파손되었다. 니느웨는 당시 이방 세계의 주요 도시였다. 이것은 때가 되면 신적 계시의 빛을 그들 어두운 지역에 비취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도를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이 만일 은혜의 수단을 소유했다면 회개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수단을 그들에게 허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마 11:21, 23). 그는 니느웨가 은혜의 수단을 소유한다면 회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그런 수단을 주셨고 요나를 보내셨다. 요나는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회개를 선포하진 않았지만(우리는 그가 그런 사명을 받았다는 말씀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에게 선포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받은 사명의 복된 결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은총을 나눠 주심에 있어 어떤 장소에는 은혜의 수단을 보내시고 다른 곳에는 보내 주지 않으시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영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심으로써 독단적이고도 전제적으로 행동하더라도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여 이같이 하나이까?"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써 마음대로 하셔도 무방한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부채를 지지 않은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라고 말씀하신다.

(1) "그것은 내가 처음에 네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네게 선포하라고 명했던 것이다(1:2). 가서 니느웨를 쳐서 외치라. 신적 심판을 선언하라.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 상달했고 하나님의 복수가 그들에게 내려온다고 말해라." 이것은 처음에 요나가 전달하기를 매우 싫어하여 다시스로 도망쳤던 메시지였다. 그런데도 요나는 두 번째로 그 메시지에 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비위를 맞추거나 그의 수긍을 보다 많이 얻기 위해 메시지를 변개시키시지는 않으신다. 아니, 요나는 처음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응하지 않았을 때의 바로 그 말씀을 전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할 수 없는 것이며 선포자나 청중의 기분에 맞춰서 왜곡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에 부응하지 않으며 사람이 진리와 율법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19).

(2) 또는 "그것은 네가 니느웨로 갈 때 내가 네게 선포하라고 명할 것이다." 이것은 요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요나와 함께 동행하시리라는 것이다. 예언의 영은 그에게 머물 것이며 그가 니느웨에 도착하는 즉시 필요한 지시를 계속 그에게 내려 주실 것이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위태로운 일을 맡은 요나에게 큰 뒷받침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을 보내셨을 때도 이와 유사한 암시를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께서 나중에 지시하시는 산 위에서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선한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께서 정하신다(시 37:23). 그는 자기 백성을 한 걸음씩 인도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따라올 것으로 기대하신다. 요나는 맹목적 신앙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지는 알지만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지는 모르게 될 것이다. 니느웨에 가야 그는 메시지를 받을 것이며 싫든 좋든 그것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시며 그의 말씀과 섭리에 의존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며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 해군 제독들이 전함을 거느리고 파견될 때 그들은 바다 멀리 나가기까지는 명령서를 개봉하지 못하도록 요구받는데 요나도 그와 같이 니느웨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 다 달으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지시를 받게 된다.

Ⅲ. 그는 자기의 사명을 신실하게 그리고 담대히 전했다. 그는 니느웨에 도착하자 자기의 교구가 무척 방대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니느웨는 삼일 길의 극히 큰 성읍이었다(3절). 히브리어로는 "하나님께 큰 성읍"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히 크다는 말로밖에 번역할 수가 없다. 큰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는 명칭을 갖는다는 히브리 언어는 크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니느웨의 위대함은 주로 그 도시의 규모에 존재한다. 니느웨는 바벨론보다도 훨씬 더 컸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는 여태껏 어떤 인간도 이만큼 큰 성은 건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니느웨 성은 길이가 150펄롱(1펄롱은 약 ⅛마일), 폭이 90펄롱, 둘레가 480펄롱이었고 성벽은 높이가 100피트였으며 전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두터웠다. 또 성벽 위에는 1,500개의 망대가 있었고 각 망대의 높이는 200피트였다. 본문에서는 니느웨가 삼일 길이라고 하고 있다. 혹자가 기술하는 대로 성 주위의 길이는 480펄롱이었는데 8 펄롱을 1마일로 잡는다면 60마일이 된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 하루 20마일씩 걷는다 치면 삼일 길로 계산이 된다. 또는 요나가 선포하면서 다닐 때는 천천히 진중하게 걸어야 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니느웨 성의 중요한 거리와 골목을 다 다니면서 이 메시지를 선포하려면 최소한 사흘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로 오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일에 열중했다. 그는 성내로 들어가자 여독을 씻기 위해 주막으로 직행하지 않고 받은 바 지시대로 자기 사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외치며 말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특별히 이 말을 선포하도록 지시받았을 것이다. 그는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을 상세히 설명했을 법도 하다. 즉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과 왜 쟁논을 벌이시며 그들의 악이 얼마나 그의 노를 도발했고 따라서 그들은 멸망을 각오하고 이 경고를 신용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런 설명을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는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한메시지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1. 요나는 그들에게 이 큰 성읍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니느웨성이 전쟁에 의하지 않고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타격 즉 지진이나 유황불에 의해(소돔처럼) 무너지리라는 것을 공표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도시들의 악은 그들의 멸망을 성숙시키며 그들의 불의의 양이 차고 복수의 수단이 이를 때에는 그들의 재산이나 큰 규모도 그들을 멸망에서 보호하지 못한다. 크신 하나님께서 회계하러 오실 때에는 큰 성읍들도 쉽사리 무너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요나는 그 성이 곧 무너진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40일이 지나면 그 성은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예기간이 허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기다리실 것이다. 즉 이런 경고가 주어지면 그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그 행위를 고쳐서 경고된 파멸을 방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지 살펴보자. 비록 니느웨의 악이 복수해 줄 것을 절규했지만 하나님께서 사십일 간은 그 성을 살려 두실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길로 오시는 하나님을 회개로 자을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더 기다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만일 그때에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칼을 버리시고 준비를 갖추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판을 연기하시기에는 사십일 간이 오랜 시간이지만 불의한 백성이 회개하고 개심하여 임박한 심판을 돌이키기에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기한을 정하는 것은 온갖 가능한 확증과 함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귀신같이 앞일을 알아 맞히는 자라도 그 시간까지 정할 만큼 대담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경악시켜 준비를 하게 만들 것이다. 태평하던 죄인도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는 정신이 번쩍 들어 진심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파멸을 예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서 일 자체가 확실하고 시기가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각성하여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당면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에 대해 캄캄하며 불확실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사십일 간 서있겠다는 말씀처럼 사십 일을 살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니, 나는 3, 40년간 산다기보다 3, 40일 이내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는 여러 수십 년 살 것으로 기대하기 쉽다. 우리가 한 달을 사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를 사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만하다.

[열왕기하 히브리어 강해설교] 엘리사의 여호람 동맹군의 승리 예언(왕하 3:13-20)

 

[열왕기하 히브리어 강해설교] 엘리사의 여호람 동맹군의 승리 예언(왕하 3:13-20)

열왕기하 3장에서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했다. 여호사밧 때문에 이스라엘 왕에게 말한다고 했다. 엘리사는 여호람과 여호사밧 동맹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했다. 여호와 하나님

bethlehem123.tistory.com

 

반응형